통일되는 그날까지… 살아만 있어다오!
통일되는 그날까지… 살아만 있어다오!
  • 하재훈
  • 승인 2015.08.1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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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 70년 특별기획

올해는 광복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해로 7500만 겨레가 더 없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받아 안은 지 벌써 70년이다.

70년이란 시간은 한 생명의 삶(生)을 정리할 수도 있는 긴 세월이다. 하지만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난 한반도는 오늘 현재까지도 달라진 것이 없는 가운데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다”며 통일과업에 불을 댕겼다.

현재 북한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과 이에 따른 외교적·경제적 압박이 더 이상 견뎌 내기 어려운 수위로까지 치달은 상태로 알려져 있다. 절대 다수의 주민들이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지난 2003년 8월 북한을 탈출해 정읍에 거주하며 통일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수연(여·37)씨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날 출구는 중국이나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다”고 강조했다.

전주일보는 지난 13일 오후 광복 70, 분단 70년을 맞아 전주일보 정읍지사 사무실에서 탈북여성 한수연씨를 만나 북한의 실상과 탈북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약속시간보다 다소 늦은 시간에 도착한 한수연씨는 미안한 듯 안면에 홍조를 띠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통일이 시급합니다” 절제된 표현이었지만 한 강사의 짧은 말은 남북통일의 절박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 무엇의 긴 울림이었다.

그녀는 1979년생으로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다. 온성군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길림성 투먼(도문)시와 맞닿아 있는 그야말로 한반도 최북단 지역이다.

한 강사는 북한을 탈출하기 이전까지 줄 곳 온성에서 자랐다. 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온성에서 소학교(인민학교)와 6년제인 고등중학교를 다녔다.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상 소학교와 고등중학교 전 과정을 무상으로 교육을 한다.

하지만 한 강사는 “말이 무상교육이지 학교에 가면 선생이 없다. 선생들이 먹고살기 위해 장사(국수)를 하는 등 생업을 위해 일터에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 강사는 “그럼에도 북한정부는 주민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세금을 요구했다”고 했다.

주민들은 송이버섯, 담배농사, 들죽 등의 농산물을 채취해 세금으로 납부를 했다고 한다. 온성군은 담배재배 주산지로 유명하다.

한 강사 또한 걸어서 1주일 정도 소요되는 청진항에 가서 담배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녀는 특히 북한 주민들은 한국이 남조선과 같은 국가인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자신들의 체제구축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그녀는 북한을 탈출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2003년 8월 어느 날 새벽, 장마로 불이 불어난 두만강을 이름도 모르는 3명의 북한주민들과 함께 건넜다. 강을 거의 다 건넜을 때, 뒤늦게 탈출을 목격한 북한 국경경비병이 총을 쏘아 댔다. 다행이 총알은 한 강사와 또 다른 탈주자 2명을 맞추지 못했다. 행운이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 도문 강기슭에 도착을 한 한 강사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중국정부의 인민해방군과 공안을 피해야 했다. 이들에게 붙잡히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와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했다. 이들은 봉고차량을 이용, 한 강사를 비롯해 나머지 3명의 탈북여성들을 빈집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인신매매단이었다.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했는데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중국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이 참으로 안타까웠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감금 된지 6일 만에 지금의 조선족 남편에게 팔렸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고향인 흑룡강성에서 살았다.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계속됐다. 북한보다는 먹고사는 게 중국이 조금은 좋아졌지만 탈북여성이라는 딱지는 지속적으로 그녀의 운명을 옭아매었다.

중국 공안(경찰)에게 바치는 뇌물 값만 해도 상당했다. 죽도로 일을 해, 모은 돈을 중국 공안에게 상납을 해야 그녀를 잡아가지 안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를 두고 5년 동안 거주했던 흑룡강성을 떠났다. 그녀는 태국과 경계지역인 중국 운남성을 거쳐 태국의 울창한 숲을 헤치며 걸어서 태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태국경찰에 의해 체포돼 이곳저곳의 감방을 옮겨 다녔다. 이후 그녀는 한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2008년 5월, 인천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전혀 낯설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고향 같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땅을 밟은 한수연씨는 당시의 소감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녀는 특히 숨어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당시 가장 고무적이었다고 기억했다.

이후 그녀는 한국정부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10년 5월에 정읍에 정착을 했다. 그녀는 화장품 외판원을 비롯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중국 흑룡강성에 있던 남편과 두 아이를 정읍으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가 북한 땅을 떠난 지 7년 만에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녀는 한국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나타낼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녀는 또 “남한사회는 북한에 비해 모든 면에 있어 천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한의 사람들이 경제적 여유를 지나치게 즐기는 것 같다”며 “허례허식과 사치를 일삼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눈물이 난다“며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가족들이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인터뷰 내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정읍=하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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