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제주 나들이
꿈같은 제주 나들이
  • 김규원
  • 승인 2023.08.31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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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섭/수필가
문광섭/수필가

하얀 목련이 담장위로 고개를 내밀고 방긋 웃는 아침, 딸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4월 마지막 주 ‘금, 토, 일’을 비워놓으란다. 우리 내외와 아빠가 제일 예뻐하는 늦둥이 외손자 태현이와 저랑 넷이서 제주 중문단지를 다녀오잔다.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내한테 말했더니,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딸 형편을 생각해서인지 반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제주도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한 번 다녀가라는 요망도 있던 터라 8월 새만금 세계잼버리를 마치고 가을쯤 다녀올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오래전 마지막으로 다녀오던 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의 오솔길을 거닐었다.

그동안 10년 넘도록 병치레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엄두를 못 내 제주를 가본 지도 20년이 훌쩍 넘어가 버렸다. 오늘따라 복지관으로 공부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나이를 먹어도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건 즐거운 일인가보다.

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그 고비 때 태어나 내 희망의 끈이 돼준 늦둥이가 올해 중학교엘 들어갔다. 그러니 겸사로 나와 늦둥이가 사흘 동안이나 함께 지내며 나들이한다는 자체만으로 즐거움이 몇 배나 될 것이기 때문에 설렘을 감출 수가 없다.

딸 역시 아들 큰놈을 해병대 신병훈련소에 보내 놓고서 내심 걱정 반, 시원 반인 참에 큰맘 먹고 이번 일을 생각해 냈지 싶다. 일주일 지나면 가정의 날 행사가 줄달아 이어지니, 아예 앞당겨서 늦둥이를 10여 년 키워준 친정엄마와 병원 담당 아빠에게 선물 대신 제주 여행을 결정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시집간 지도 20여 년이 넘은 터에 딸과 모처럼 넷이 함께 지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4월 마지막 주 금요일 점심때, 딸이 외손자와 함께 차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처음 연락받을 때 만해도 한 달이나 남았기에 한참 걸릴 거로 여겼으나 시간이 금시 흘러갔다.

호남고속도로를 1시간쯤 달렸는데, 벌써 광주공항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활주로를 이륙하는 여객기가 시야에 들어와서야 드디어 제주에 간다는 실감이 일었다. 왜냐면 외손자와 우리 내외가 호남평야 들녘을 지나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여행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평소처럼 그냥 나들이 정도 나가는 기분이었다.

승용차를 내려 앞서가는 태현이를 뒤에서 바라보니 중학생이 돼서 그런지 키도 부쩍 자랐고, 의젓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힘들 때 ‘태현이가 중학교 갈 때까진 살아야지’라며 입버릇처럼 되새기고, 이를 깨물며 고통을 이겨내던 순간들이 아른거리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시기를 잘 보내고 여행까지 왔다고 여기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 온다.

13시 50분, ‘진에어 여객기’가 활주로 끝에서 엔진을 크게 돌리는 소리가 들려서야 대기실에서 무료했던 기분이 살아나며 활기를 띤다. 잠시 뒤 활주로를 따라 힘차게 달리던 비행기는 육중한 동체를 번쩍 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힘든 날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에 날 오리니”라는 가곡 멜로디가 저절로 입안에서 여울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는 순간, 벌써 창가로 멀리 남해안의 섬들이 둥실둥실 떠가고 있다. 나는 앞좌석이고, 셋은 한 줄에 나란히 앉아 있어 태현이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으나 도란도란 나누는 소리로 봐서 창문에 펼쳐진 풍광을 보는 듯하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가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처음 보는 들녘과 지나치는 도시의 빌딩을 보고 놀라던 게 아련히 떠오른다. 그땐 여객기가 없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또한, 고등학교 2학년 때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던 일도 떠올랐다.

아주 까마득한 시공(時空)을 오가며 즐기는데, 기장으로부터 제주공항에 곧 착륙한다는 안내가 들려 왔다. 이륙한 지 25분 남짓한데 벌써 창가로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이 들어오고 제주시가지가 한눈에 안긴다. 꿈같은 제주의 나들이가 파도 위에 윤슬로 다가든다.

푸른 바다가 잔잔한 파도 위에 누워서 손짓하는 가운데 그동안의 시름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것 같다.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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