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신호등
빨강 신호등
  • 김규원
  • 승인 2022.10.2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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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웬 철쭉꽃일까? 이 가을에.’

계절의 순환 열차에서 밀려난 낙오자일까? 아니면 최후까지 몸부림치며 막차로 온 손님일까? 봄꽃보다 더 화려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연분홍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정갈한 맵시이다. 어딘가 모르게 우수를 한 아름 품고 있는 듯 가을바람에 파르르 떤다.

엷은 가을 색이 뜨락에 내린 멋진 오후다. 성깔 부리던 더위도 고개를 반쯤 숙였다. 솔숲에 씻겨나온 삽상한 바람이 몸 안으로 스며든다. 나무며 풀들이 파란 생기를 지우고 파스텔색 새 옷을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뭇 생명이 어우렁더우렁 모여 사는 공원에 올랐다.

벚나무들은 한해의 생을 갈무리하고 겨울 준비에 나선 듯 연갈색 잎을 실바람에 줄줄이 실려 보낸다. 내어줄 것은 미련 없이 버려야 함을 가르쳐 주는 걸까? 긴 겨울 여정을 앞두고 길 나선 행자처럼 몸피를 줄이는 걸까?

풀숲에 어우러져 사는 철쭉들도 한여름 피어오른 윤기를 덜고 가을로 갈 채비를 한다. 그런 철쭉들 사이에 유독 등불처럼 매달려 있는 꽃 한 송이. 그 꽃을 보는 순간 내 마음 저 안에서 궁금함이 뭉근히 솟아올랐다.

봄날의 화려한 꽃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고 이 가을에 그 분풀이로 가슴을 활짝 연 것인가? 숱한 사연을 넘어 오늘에 이르렀지 싶다. 풀벌레가 목청을 돋우는 밤이면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보며 심중에 첩첩 쌓여 있는 앙금을 풀었을지도 모른다.

봄철 무리 지어 어울려 피어야 아름답고 찬란한데. 지난여름 거친 비바람과 무더위를 이기며 한 떨기 꽃으로 오롯이 핀 열정만은 찬사를 들을 만하다꽃은 계절에 따라 핀다. 희망으로 마음을 부풀게 하는 봄꽃, 용암이 분출하듯 역동적인 여름을 사랑하는 꽃도 있다.

푸르른 가을 창공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꽃. 살을 에는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피어나 절개와 순결의 의미를 새기는 꽃도 있다. 봄철에 피어야 할 철쭉꽃. 가을에 불을 밝혔다면 나름 긴긴 사연이 있을 터이다.

나는 꽃을 보며 속삭였다. 계절을 거슬려 핀 너.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이 있을 테고 도전 끝에 얻은 선물일 수도 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작은 화원을 차렸다면 화사한 가을 녘, 네게 눈길 머문 모든 이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어라.

아름다운 마음씨로 보듬어 준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 떨어지기 직전 삶을 맘껏 불사르는 붉은 단풍처럼 뜨겁게 살다 시린 겨울 오기 전에 삶을 멋지게 완성하여라. 사람들은 너를 보고 환호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고운 마음을 닮으려 한단다. 나도 너 같은 꽃 한 송이 가슴에 심으마.

제철을 깜박하고 피어난 꽃이 비록 이 꽃만이 아니다. 철 지나 돌 틈에 핀 철딱서니 민들레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진달래가 분수를 모르고 가을 산언덕을 연분홍으로 꼽게 물들이기도 한다.

계절을 망각한 듯 핀 철부지 꽃들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한다. 지난가을 초등학생 손자와 공원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샛노란 개나리가 울타리에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왜 가을에 늦게 필까? 물음에 적당한 답을 하지 못했다. 철쭉꽃을 본 오늘도 역시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저 평범한 인간 주제에 깊고 깊은 대자연의 순리를 어찌 다 가늠하리? 다만 꽃이 제철을 지나 늦게 피는 현상은 내 유년의 시절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어느 날 TV에서 한 장면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백두 대간의 구상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들이 누렇게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고 군락이 통째 메말라 가니 머지않아 온 산천이 상처투성이로 남을 것 같은 예감이다.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며 하늘 향해 발돋움하는 나무들인데. 푸른 기백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들인데. 청정한 삶을 어이없이 끝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철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청설모, 다람쥐는 무엇으로 삶을 이어갈지?

식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진딧물 나방이 산이나 들은 물론 시내 중심지까지 떼거리로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힌다며 아우성친다. 모기들이 토네이도처럼 휘몰아 닥쳐 극성을 부린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2020년엔 이상 저온으로 봄꽃이 채 피어나지 못했고, 지난해엔 꽃은 피었으나 비가 너무 자주 내려 벌들이 폐사했던 적이 있었다.

잘 견뎌온 그들까지도 리듬을 잃은 것은 철로를 이탈하여 달리는 기차처럼 변덕을 부리는 이상 기온의 탓이 아닌가 한다참하게 펴진 꽃 볼 위로 따스한 가을 볕뉘 한 줌이 사뿐 내려앉는다. 보송보송한 꽃이 나를 보며 상긋 웃는다. 아니 속으로는 울음을 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가 잘못된 자연의 불협화음에 태어난 사생아라고 한숨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와 무언의 대화로 아기자기한 감동과 설렘을 엮어 보았지만, 어쩌면 자꾸 지쳐가는 지구가 안쓰럽게 보내는 빨강 신호등 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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