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삶의 길이 계산법”
“줄어드는 삶의 길이 계산법”
  • 김규원
  • 승인 2024.10.14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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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81

 

한 자유가

산책로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이자

그녀는 재빨리

공권력을 발휘하여 거리를 좁혔다

 

또 한 다정이

냄새의 본향인지 사람나무에 다가가자

위험한 짓거리라며

무릎 아래 무릎을 꿇렸다

 

길이 없는 곳으로 벗어나자 할 때마다

들꽃천지로 옮겨가자 할 때마다

울타리 안으로 끌어당기던 이여,

이제, 내게 남은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요

 

졸시공원에서 -1전문

  식용에서 집지킴이로 승진하더니, 집지킴이가 애완견으로 영전하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애완견이라고 하면 견주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하다. 이 영물스럽고 사랑스러운 내 가족이 무슨 장난감이냐고 항변이라도 할 태세다. 요즈음에는 반려견이라는 이름으로 품격 있는 가족이 되었다. 반려伴侶-생각이나 행동을 항상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가 되었다. 당연히 반려자에게 베푸는 정성이 사람의 격으로 올라간 것이 근래 풍경이다.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주인이 장기 출타할 때는 호텔에 맡겨 외로움을 달래준다. 사람 아플 때보다 치료비가 더 들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식사도 그냥 남은 밥찌꺼기나, 동물사료를 먹이는 건 옛날이야기다. 삼대 영양소가 고루 섞인 영양식을 공급해야 하고, 간식거리 또한 시간과 양을 조절하여 제공한다. 반려자에게 베푸는 당연한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려자와 공원 산책이라도 나갈 때면 어김없이 목줄을 채워야 한다. 목줄도 실용화되어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당기고 늘리기를 주인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반려견이 조금이라도 길에서 벗어나려 하면 사정없이 목줄을 당겨 지근거리로 끌어당긴다. 다른 행인에게 관심이라도 보일라치면 매몰차게 목줄을 당겨 주인 곁에서 맴돌게 한다. 아무리 인간의 반려라고 존중할지라도, 개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의지가 발붙일 틈이 없으니, 개는 개일 뿐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어찌 개뿐이겠는가?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큰 자유는 물론 행복추구이겠지만, 그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공통되는 행복이 바로 이동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 머물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자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을 자유, 이 자유가 소중한 것은 이런 자유를 박탈당한 전제국가의 실정을 보면 실감이 간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이동의 자유가 실제로 그렇게 막힘없이 구사될 수 있을까? 내 몸 내 의지대로 기거동작起居動作-행주좌와行住坐臥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자문에 이르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반려견이 주인의 목줄 길이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목줄을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첫째는 나이라는 시간의 줄 때문이다. 인간은 날마다 살아간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은 날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날마다 죽어간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주인이 쥐고 있는 목줄의 길이를 반려견이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생명의 길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얻은 생명의 길이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 목줄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이를 잡아당기는 세월의 목줄이 짧아지는 것을 실감하는 연치에 이르면, 비로소 남은 삶의 길이를 생각하게 된다.

  둘째는 삶이라는 생활의 줄 때문이다. 인간은 뭔가를 해야 한다. 작용하지 않으면 반작용도 없는 것이 우리 삶이다.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밭을 갈아야 하며, 비바람을 막으려 부지런히 집을 지어야 한다. 삶이 단순히 의식주를 마련하는 일에만 매여 있는 것이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게 보통의 삶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업 때문에 그렇게도 선호하던 해외여행을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생업만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면서 나만의 자유를 구가하며, 독불장군처럼 저 홀로 여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하다. 험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야말로 이동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 행복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셋째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의 줄 때문이다.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인생관에 기초하기 십상이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인생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태생적으로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가성비[價性比: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을 줄여 이르는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여행을 별로 선호하지 않기도 한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행의 자유가 곧 인생의 자유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그것을 일종의 방랑이요 방황이라고 여길 법하다. 한 사람이 지닌 인생은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관점이라는 줄에 얽매인 꼴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드리워진 이 운명의 줄을 늘일 길은 없는 것일까? 없다! 왕후장상에게도 그런 방법과 그런 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은 무모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외로움을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과감하게 삶의 방향을 바꿀 수만 있다면 운명의 줄에 매달려 애면글면[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창조자의 위치로 바꾸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결단이다. 그러자면 현실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변화는 곧 기왕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 일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바로 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길, 여생을 담보하여 운명의 목줄을 걷어내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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