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전성시대
산의 전성시대
  • 김규원
  • 승인 2023.06.0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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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수필가
이용만/수필가

산에는 온갖 나무들이 다 모여 살고 있다언뜻 보기에는 얼마 안 되는 나무들이 고만고만하게 모여 사는 것 같지만 수도 없이 많은 나무가 섞여 살고 있다. 보통 때는 잘 보이지 않으나 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하나씩 하나씩 그 자태를 드러낸다.

산에도 전성시대가 있다. 산의 전성시대는 꽃이 필 때이다. 꽁꽁 얼어붙어 있던 대지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맨 먼저 기지개를 켜는 것은 나무와 풀이다.

풀이야 대부분 잎부터 피우지만, 나무는 꽃부터 피우는 것들이 많다.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미처 잎을 피울 새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은 매화요, 이어서 피어나는 꽃은 개나리다. 개나리꽃이 온 동네를 덮고 나면 비로소 봄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산에서는 별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노랗게만 보이던 개나리가 파릇파릇한 잎들과 섞어질 즈음부터 산의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맨 먼저 산을 덮는 것은 산벚꽃이다. 누가 벚꽃을 일본 꽃이라 했던가. 벚나무는 그냥 꽃을 피울 뿐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그냥 꽃일 뿐인데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 누구네 꽃입네하고 우길 뿐이다.

벚꽃이 지고 나면 진달래 세상이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진달래가 온 산을 덮는다. 이때는 산에 온통 진달래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월의 약산 진달래가 아니더라도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에나 진달래꽃이 핀다. 진달래는 철쭉으로 이어지면서 상당히 오랫동안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5월이 오고 신록이 온 천지를 덮고 나면 키 작은 진달래나 철쭉으로는 산을 지배하지 못한다.

이 때에 등장하는 것이 아카시아꽃이다. 아카시아꽃은 꽃도 꽃이려니와 향기가 온산을 덮는다. 아카시아꽃과 더불어 산 아래를 덮는 꽃은 싸리꽃이다. 전에는 산골 학교 교실의 꽃병을 장식했던 꽃인데 지금은 자연보호를 위해 있는 자리에서만 볼 수 있다.

아카시아꽃이 질 무렵이면 산자락에는 층층나무가 꽃을 피워낸다. 말 그대로 작은 꽃들이 모여서 층을 이루며 피어난다. 이 꽃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제 멋이다. 보통 때는 몇 그루 없는 것처럼 보이던 이 나무도 꽃이 필 때 보면 그 수가 제법 많다.

층층나무꽃이 지고 나면 자귀나무 붉은 꽃이 여기저기에서 피어난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나무가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 그 수가 보통이 아니다. 산의 여기저기에서 꽃을 피워 먼 곳까지 시선을 끈다.

산은 언제나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웅장한 자태로 많은 나무를 키우고 있다가 때가 되면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로도 화려하게 꽃을 피워 전성시대를 이룬다제법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다.

6월이 오고 날씨가 더워지면 꽃들의 시대가 끝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6월 무더위 속에서도 온 산을 덮듯이 꽃을 피워내는 것은 밤나무다. 밤꽃은 꽃 하나하나를 보면 꽃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다. 지렁이처럼 길쭉한 것이 모양새도 없다.

아무리 보아야 예쁜 데라고는 없는 그 꽃이 집단을 이루어 피어나면 온 산을 덮는다. 밤꽃은 산뿐만 아니라 마을까지도 덮는다. 그리고 향내가 온 세상을 진동케 한다. 이 향내가 벌들을 불러 모아 밤나무 밑에 가면 붕붕거리는 벌들의 소리로 별천지가 된다.

밤꽃이 지고 나면 산의 나뭇잎들은 자랄 대로 다 자라 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나무를 키우는 일을 한다.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영양분을 만들어 나뭇가지로 보낸다. 나무의 키가 부쩍부쩍 자라는 때이다.

가을 낙엽이 질 때까지 정신없이 산은 나무들을 키우는 일에 몰두한다. 가을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잎을 물들일 때도 나무들은 자기의 때에 따라 자기의 빛깔로 잎들을 물들인다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산의 전성시대를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산의 나무들은 그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때를 기다렸다가 저렇게 왕성하게 꽃을 피워내면서 치열한 삶을 영위하는데 그동안 별생각 없이 살아왔던 나의 삶이 부끄럽기도 하다. 때로는 옷깃이 여미어지기도 한다.

온 산을 덮듯이 많은 수를 가졌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때가 되면 다른 나무들에 전성시대의 자리를 내어주며 수가 적다고 움츠러들지 않고 몇 개 안 되는 나무로도 때가 되면 힘껏 꽃을 피워 산의 전성시대를 이어가는 나무들을 본받고 싶다.

많거나 적거나 차별하지 않고 제때에 각각 전성시대를 누리게 해 주는 속 깊은 산의 마음을 또한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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