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이 수악한 것들아~!”
“아이고, 이 수악한 것들아~!”
  • 김규원
  • 승인 2023.05.2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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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20

 

 

우리할머니 입에 달고 사시는 지청구가 있다.

팔을 걷어 부치고, 손주녀석 세수시키다 누렁콧물을 훔쳐내시며,

아이고, 수악한 거~!”

‘~를 뽑아낼 때면 두 옥타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질러대는

조수미 소프라노 목청높이도 뺨칠 만했다

 

사람들은 그 수악한 것이

무슨 빨갱이공산당이거나, 불한당두목쯤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한 또랑건너집 구미리댁에게도,

앵두나무우물가에 바람났다고 소문난 철식이복순이에게도,

늙은 어미아비에게 패악질했다는 삼대독자 한가놈에게도,

보릿고개 보리됫박이나 얻으러 간 민씨쪽박 걷어찼다는 윤가놈에게도

우리 할머니는 예의 그 소프라노 목청을 뽑으셨다

 

지금은 평생 지청구 해대시던 수악한 것들 모두 냅둬버리고

고산면 남봉리 양지녘에서 밤낮으로 안수사만 바라보시는

우리할머니가 계셨더라면

이 몹쓸 세상소문 들으실 때마다

얼마나 자주 소프라노 목청을 높이셨을지

아이고, 수악한 것들아~!”

 

-졸시아이고, 수악한 거~! -내 서정의 기울기 10전문

 

요즈음에는 애드리브(an ad lib)라고 물 건너온 말로 해야 고급스럽게 들리겠지만, 우리 말글살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마다 입에 붙은 말이 있다. 입말이요 구어口語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문법이나 어법은 물론 예의나 점잖음과는 괘를 달리한다. 하긴 문법이나 어법이라는 것이 언중들의 말이 먼저 있고 난 다음, 그 말에 대한 질서와 규칙을 찾아내어 명문화한 것이라면, 입말의 맛깔스러움이 상스럽다(?)거나, 비문[非文-卑文]이라고 해서 탓할 일은 아니다.

 

연극이나 방송에서, 출연자가 대본이나 각본에 없는 말이나 연기를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것을 애드리브라고 하듯이, 이런 즉흥적 입말일수록 말하는 사람의 꾸며지지 않은, 진솔하고 즉흥적인 감정을 알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애드리브나 입말 구어는 미리 준비가 없다는 점, 즉흥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상황에 녹아들어야 가능하다는 점, 그래서 말하는 이의 솔직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말글살이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한 사람의 속내를 제대로 드러냄으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의를 없애고, 한층 감칠맛 나는 사람과 사람의 모둠살이를 가능케 하는 구실도 하는 것이다우리 할머니께서도 그러셨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민망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반응이거나, 해서는 안 될 행태를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은 것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그도 아니면 당신의 상식으로 볼 때 정도가 지나친 것에 대한 놀람이거나, 지레 설레발을 강하게 걺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딴 소리를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머니의 목청 높인 지청구는 사연을 전한 사람이나, 그 사연을 해석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의를 달지 못하게 윽박지르는 효과, 상대의 기를 꺾어놓을 요량이실 때, 늘 입에 달고 사시는 애드리브이자 입말이셨다.

  “아이고, 수악해라~!”

  “아이고, 수악한 거~!”

  “아이고, 수악한 것들이네~!”

등등 수악하다는 말은 우리 할머니에게는 가장 질량이나 정도나 함량이 최대치로 큰 최고의 영탄조의 지탄이었고 지청구였으며 감탄사였다.

 

아이들은 세수를 한사코 하기 싫어했다.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옛날 시골 생활에서 그것도 겨울철에 세수하라는 집안 어른의 명령은 고역이었다. 이럴 때면 우리 할머니는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어린 손주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수건을 두르고 손수 얼굴을 씻겨주셨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세수 당하는 고역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이의 누렁 콧물을 훔쳐내며 예의 아이고, 수악한 것~!” 냅다 고함을 치면 아이는 이내 잠잠해지곤 했다. 그 누렁 콧물이 무슨 대역 죄인이나 된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냅다 닦아내시며 지르시는 할머니의 지청구는 그만큼 힘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네방네 입소문에 대하여 할머니는 끊임없이 평가를 내리시거나, 단죄를 해대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몹쓸 작자로 내치는 말에 으레 그 아이고, 수악해라~!”를 동원하곤 하셨다. 할머니가 내리는 수악하다는 판정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불평불만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할머니의 지청구는 엄정하기 그지없는 판사의 판결이었고, 불편부당하기 짝이 없는 포청천에 버금가는 권위와 존엄성을 인정받으셨다.

 

다만, 수악하다고 보신 할머니의 속내를 짐작 못 할 바는 아니다.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삶의 진실에 비춰볼 때 당신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놀랄만한 사건-사고에 대한 꾸밈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손주의 누렁 콧물이 뭐 그리 수악할 것인가. 그래도 한사코 세수를 마다하는 손주를 단 한 마디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랑의 말씀, 시골 살림에 뭔 그리 큰 빚이었을까 마는 청상과부로 살기 어려운 살림을 거둬 줄행랑 친 인생살이에 대한 동정의 말씀, 청춘남녀의 연애담은 시골 마을의 빅뉴스가 될 법한 일에 대한 즐거워하시는 말씀, 조동 없이 자란 자식이 부모에게 어린양 부린다는 것이 도에 지나쳐 사람들의 입설에 오르내림에 안타까워하시는 말씀, 그리고 가난을 보듬지 못하는 졸부에 대한 원망의 말씀, 그런 마음결을 단 한 마디의 지청구, “아이고 수악한 거~!” 토해내셨을 것이다. 한풀이하듯 냅다 소리를 지르셨을 것이다.

 

요즈음에는 그런 지청구라도 해대는 어른들이 그립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이 되어도 바른 말씀보다는 편드는 소리, 옳은 말씀보다는 편 가르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이럴 때 우리 할머니 살아계셨더라면, 아이고, 이 수악한 것들아~! 하시며 냅다 지청구를 시원하게 토해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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