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필木筆
목필木筆
  • 전주일보
  • 승인 2023.04.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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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어린 김정희가 빈 하늘에 추사체로 글을 쓴다
일필휘지다

잔털 송송한 꽃송이가 오진 목련 꽃봉오리
구름을 듬뿍 찍은 붓끝이 
야무지다

지금은 서예 중

하늘의 여백이 광막해도 목필은 계란 아니면 달걀
어쩔 수 없는 하얀
곧 병아리 울음소리 목련 아래 
흥건하리라

봄바람이 글자들을 쓸어가도 
흔적은 여전히 
목련꽃으로 피어나고

아직도 남아있는 꽃불씨 불끈 쥐면 목련마다 담긴 햇살이 
펑펑 
폭죽처럼 터질 이리라
꽃비 내리라고

훅 자란 김정희가 봄하늘에 
목필로 아무나 해독할 수 없는 이승을 기록한다
춥고 어둡던 지난겨울 
누렇게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목필木筆 : 목련이 피기 전 꽃봉오리가 붓처럼 생겼다는 뜻

목련木蓮은 나무에 피는 크고 탐스러운 연꽃이라고 연화蓮花, 옥 같은 꽃에 난초 같은 향기가 있다고 옥란玉蘭, 꽃봉오리가 모두 북쪽을 향했다고 북향화北向花, 옥처럼 깨끗하고 소중한 나무라고 옥수玉樹, 난초 같은 나무라고 목란木蘭, 꽃눈이 붓을 닮았다고 목필木筆이라고 한다.

이른 봄추위가 채 가시기 전에 잎도 없이 저 혼자 꽃 피우는 목련은 초현실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유난히 크고 풍성하고, 유달리 하얀 꽃은 으레 병과 죽음이 따라붙는다. 폐병을 앓던 사내가 이웃집 처자에게 목을 매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뒷집 닭장에 숨어 들어가 계란을 훔쳐먹다가 들켜 초주검이 될 때까지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뭄에 말라가는 수숫대에 못난 수수 모가지가 미안스럽게 오종종 매달려 있기도 하다. 죽음이 있어 미련도 있다. 목련은 가난한 시절 허기도 잘 참았다. 후카시를 몽땅 넣은 파마머리를 한 고모도, 노름판에서 신세를 완전히 조진, 건너 뜸 맹구 아제도 슬픔처럼 핀다. 지는 목련은 참혹하다. 개화의 화려함과 낙화의 처절함이 극명한 꽃 목련꽃은 백목련이 지고 나면 자목련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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