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를 맞으며
봄비를 맞으며
  • 김규원
  • 승인 2023.03.16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 규 풍/수필가
최 규 풍/수필가

봄비가 아침부터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 4시가 가까워도 계속된다. 비가 내리니 오래도록 가물었던 땅이 반갑게 껴안으며 즐거운 함성이다.

삼천을 아내랑 걸었다. “어디에선가 닭고기 삶는 냄새가 나네.” 아내의 말이다. 두리번거렸다. “닭은 아침부터 무슨 닭은 삶아?” 내 말이다. 둘러보니 개울에서 냄새가 났다.

들가지가 봄비를 맞으면서 연하디연한 연두색 눈을 뜨고 속삭였다. “여기에요. 저랍니다.” 배추 삶는 냄새 같기도 하고 쑥갓을 데치는 냄새 아니면 취나물을 삶는 냄새가 봄비에 취한 버들가지에서 났다. “버들 아가씨 냄새구먼.” 나무도 새 움이 나올 때가 예쁘구나.

사람도 미운 아기는 없다. 천록을 먹고 나온 버들눈이나 아기는 똑같이 예쁘다. 그런데 천록(天祿)이 다 하고 나면 젖을 뗄 때 엄마 젖꼭지에 소태나무즙을 바른다. 아기가 그걸 모르고 젖을 빨다 울어버린다. ‘엄청나게 쓰다. 왜 엄마 젖이 이렇게 쓰지?’ ‘, 아가야, 네가 다 먹어버려서 안 나와, 젖 시암()이 말라서 쓰단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맘마를 먹어야 해.’ 아기는 끝내 울어버린다. 서럽다. 엄마 젖이 말라버렸다니 억울하다. 어쩔 도리가 없이 서러움을 참았는데 2년 후에 동생이 태어났다.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먹인다. 동생이 밉기만 하다. ‘내 젖을 빼앗아 먹다니, 엄마가 나를 속인 것 아냐?’ 버드나무 잎도 천록이 다하면 아기처럼 허전할지도 모르겠다. 잎 하나하나가 스스로 일을 해서 살아야 한다. 내년에 새로 태어날 잎눈을 위해서 광합성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스스로 숨을 쉬면서 햇빛으로 양분을 만들어야 한다. 갓 태어난 물고기도 태어나서 며칠간은 천록으로 자란다. 그러다가 먹이를 뿌려주면 다투어서 먹는다. 스스로 살기 위해 먹이를 다툰다.

 

봄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농사 준비를 서두른다. 씨 뿌려야 할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다. 사람의 한평생도 다를 바가 없다. 준비해야 할 때 잠을 자고 있으면 어른이 되어도 철부지에 불과하다. 어떤 일을 두고 미리 연구하고 대비하고 기다리면 어려움이 닥쳐도 안심이 된다. 성공의 확률도 높다. 하지만 사전 연구와 대비가 없이 갑자기 큰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다.

 

인생의 종점인 죽음도 그럴 것이다. ‘죽음 보따리를 나이 40이 되면 챙겨야 한다.’ 하신 소태산(少太山) 박중빈 대종사의 말씀이 가슴에 울린다. 내 죽음 보따리에는 무엇을 싸서 떠날까? 저승사자에게 줄 노자를 싸고 염라대왕에게 줄 뇌물을 쌀까? 죽는 자가 돈을 들고 가는 일은 보지 못했다. 아니면 사람들의 손가락질 녹화기와 그놈 잘 죽었다라는 빈축과 조소가 담긴 녹음기를 쌀까?

 

이 세상에 다녀가는 모습은 누구나 한결같다. 공수래공수거다. 한 푼 노자도 못 가져간다.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일생을 자기 스스로 녹화한 몰래카메라 테이프가 보따리에 싸일 뿐이다. ‘그 사람 참 안됐네,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떠났어도 잊을 수 없는 분이야.’ ‘자동으로 극락에 갈 사람이지’ ‘아무렴, 천당에 저절로 올라갈 사람이여.’ ‘후생에도 잘 태어날 사람이어’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이여’,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아까운 사람이다.’라는 평을 들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세상을 잘 살고 간 사람 아닐까?

 

세상을 떠나도 남들이 가슴에 애석함과 안타까움을 남길 수 있다면 분명히 아름다운 삶이다. 외롭지 않은 죽음이다. 나는 죽음의 길에 남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까. 아니,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봄비는 만물을 눈뜨게 하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천록이다. 봄비의 기운은 생동과 활력이다. 봄비는 만물을 살린다. 어미처럼 모든 생물을 깨우고 기른다. 남의 일처럼 무심히 건성으로 보지 말자. 봄비는 따뜻하고 너그럽다. 얼음을 녹이고 씨앗이 눈뜨게 한다. 봄비는 여름 폭우처럼 쓰러뜨리거나 짓밟지 않는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온 대지를 적시며 만물 위에 골고루 내리는 봄비를 삶의 화두로 삼아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