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에 내려앉은 어린 봄
버드나무에 내려앉은 어린 봄
  • 김규원
  • 승인 2023.02.1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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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공원 호숫가에 버드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지난 늦가을, 마지막 잎새를 떠나보낸 후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을 묵묵히 견디어 온 호수의 수호신이다.

호수를 굽어보며 지난해의 푸름을 곱씹듯 하더니 어느새 고무줄같이 기다란 줄기에 품고 있는 연녹색 빛깔이 봄의 숨결에 살포시 눈을 떴다.

이곳 호수의 버드나무에 봄을 알리는 왈츠가 울리면 오동도에서는 동백꽃 핏빛 화신이 전해 오고 섬진강 하구 마을에서는 홍매화가 찬 바람에도 불을 밝힌다는 소식이 울안으로 들려온다.

눈 덮인 지리산 자락에는 복수초가, 변산반도의 바람꽃도 이에 뒤질세라 핀다.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사랑의 기운이 꽃잎처럼 돋아날 터이다쌀쌀한 겨울바람 틈새로 봄 햇살이 아장아장 나들이 나오고, 아지랑이 흥겹게 나풀거리면 가지에는 수액이 흐르고 저고리 옷고름처럼 긴 잎들이 눈을 뜨느라 보실거린다.

그때쯤이면 개구리도 꿈틀거리고 삭정이 같은 내 몸에도 전신으로 봄기운이 실오라기처럼 퍼져 나간다버드나무는 키가 크고 큰 영역을 차지하는 나무다.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가지와 긴 잎을 가졌다. 팔등신 미인처럼 낭창하게 늘어진 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잘 흔들린다.

창공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과 같이 하늘거리는 저 여유. 세상을 살다 보니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럽게 사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는 것을 거니 챈 것일까?

버드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경창과 관기(官妓) 홍랑이 이별의 정한을 아쉬워한 시다. 한양으로 떠나는 최경창을 따라나설 수 없었던 홍랑은 함관령에서 그를 배웅할 제 이슬비 내리는 저문 날, 버들가지 한 가지를 꺾어 주며 그녀의 마음을 전해 준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왜 꼭 버들가지였을까? 아마도 버드나무 부드러운 가지가 살가운 자신이고 일찍 트는 새잎은 청초하고 그리움에 지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신분을 초월한 연인 사이의 안타까운 이별의 아픔이 절절히 배어 있다. 버드나무에 돋아난 새잎에서 새삼 홍랑의 애절한 사랑그리움, 여염집 아녀자보다 더 곧은 정절,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대를 넘어 내 가슴에도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버드나무는 잎이 돋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녹색으로 짙어졌다. 녹색은 생명의 빛이다. 버드나무에 봄기운이 감돌면 우주 삼라만상이 꿈틀대고 있다는 증거다. 머지않아 다른 나무들도 앞다투며 싹을 틔우고 꽃도 피워 봄을 노래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벌 나비가 날고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러지겠지. 내 몸에도 혈기가 수액처럼 돌아 가슴에는 푸른 풀밭이 펼쳐지겠지.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급한 아이는 졸졸 흐르는 얼음장 밑에서 온다고 한다. 가슴 부푼 청년은 아가씨들의 옷자락에서 온다고 한다. 어느 가수는 산 너머 남촌에서부터 온다고 노래했다. 나의 봄은 호수가 버드나무 가지에서 피어오르는 듯하다. 오늘 아침 산책을 나선 나에게 버드나무가 보내는 연둣빛 메시지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 풋풋한 봄을 좋아한다. 가벼운 봄옷 사이로 스며드는 봄바람에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대지에 흐르는 촉촉한 온기에 움츠려졌던 몸에 활기가 돋는다. 들에 산에 지천으로 피는 이름 모를 꽃을 보며 말라버린 정서도 살며시 고개를 들 것이다. 소멸을 향해 점점 다가가는 내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 줄기 바람이 버드나무를 깨우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연두색 무성한 가지가 출렁출렁 춤춘다. 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 한 쌍이 서로 애무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내 마음이 붕 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 봄이다. 봄을 기다리는 것은 버드나무 가지도 잎도 아니고 까치도 아니다. 나의 마음이다. 나는 벌써 버드나무에서 봄을 보고 느낀 것이다.

다른 나무에 비해 미풍에도 흔들리는 모습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탁 부러지는 성정보다는 조금은 굽힐 줄도 알고 양보할 줄 아는 삶의 지혜가 느껴진다. 이것 또한 다른 나무에서 발견할 수 없는 버드나무에서만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줏대 없이 흔들리지는 않으리라. 버드나무가 피워내는 연둣빛 안개에 풀꽃도 피어나고 봄은 이내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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