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시간의 덤 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덤 위에 살고 있다
  • 김규원
  • 승인 2023.02.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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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쌈지공원 아고라에서 만난 아주머니 두 분

목줄한 해피를 사이에 두고 철학을 하신다

우리집양반은 복실이를 딸처럼 이쁘다며 죽고못살더라고요 어느 날부턴가 글쎄 앞가림을 못하다가 변가림도 못하더니 밥도 안 먹고 비실비실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갸도 노화되면 그런 다네요 글쎄 그 후론 우리집양반 강아지 개소리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니 저리 홀로……

시간은 위대한 교사이지만, 불행히도 제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베를리오즈(L.H.Berlioz.1803~1869.프랑스.작곡가)

 

-졸시무서운 스승전문

가곡은 아름다운 음악이다. 이렇게 말하면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지청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무슨 가요경연프로그램이 케이블 TV를 점령한지 오래고, 공중파 방송에서도 가요 경연프로그램이 인기 상위를 차지하는 마당이라 더욱 그렇다. 트로트 경연대회며,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초등학교 학생이 트로트가락을 구성지게 불러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람들이 왜 가곡보다 대중가요를 좋아하는지 짐작이 가기는 간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래든 가요든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성정이나 사람살이에 어울릴 때 노래의 맛이 살아날 터이다. 그런데 아직 열 살도 못 넘긴 아이가 사랑의 기쁨이며 이별의 아픔을 쥐어짜듯이 부를 때, 반드시 가창력만으로 좋다고 박수를 보내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학교에서도 동요나 가곡보다는 K팝이나 아이돌 가요, 로켄 롤이나 랩송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학생들이 그런 노래를 모르면 유행에 뒤처지고 모자란 아이 취급을 받기라도 하는지. 한사코 유행가를 선호하는 아이들이 대세다. 그런 가요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성장기의 학생들이 한사코 성인가요에 몰입함으로써 균형감 있는 정서의 발달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가곡이 아름다운 것은 멜로디에도 있지만 노랫말의 서정성에 있다고 본다. 대부분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 깊이 서정의 공감이 여울지게 한다. 요즈음 방송을 많이 타고 있는 가곡에 <시간에 기대어>(최진 작사 작곡)란 곡이 있다. 바리톤 고성현이 불러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가곡이다.

노랫말은 이렇다.저 언덕 너머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 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 있을까/ 후회투성이 살아온 세월만큼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그 시간에 기댄 우리우리 아이들이 대중적인 가요도 좋아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노랫말로 된 가곡도 함께 즐겨한다면 성장 세포마다 균형 있는 서정이 자리할 것이다.

성장기에 있으면 언제나 어른이 되나?,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 기다림의 가장 큰 요인은 성인이 되면 만사를 내 마음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어른의 간섭을 벗어나 자기 삶의 자유로움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앞당겨 나아가지 않아도 미성년자는 눈 깜박하는 사이 어른이 되고 만다.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사를 자유롭게 재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무한 책임의 사슬 앞에 스스로 묶이고야 마는 어른[성인]은 금방 자신을 옭죄게 된다.

시간의 법칙이 그렇다. 그래서 어른은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년자를 어린이의 눈높이와 마음결로 보살펴야 하며, 미성년자는 언제나 어른의 눈높이와 마음결로 어른의 세계를 눈 여겨 보며 부러워하되 섣불리 어른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 벨트는 어김없이 솜털 보송한 청소년을 수염 까칠한 어른으로 바꿔놓고 만다. 그것도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옮겨놓고 만다.

그런데 하물며 그 파릇하고 푸릇하며, 보송하고 보드라운 청소년의 풋풋한 아름다움을 어른들의 흉내를 내어가며 사랑에 찌든 비가를 불러야 하며, 사랑에 배신당한 아픔을 앞당겨 흉내 내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경과는 환영幻影에 불과하다고 했다. 영원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재주의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시간은 우리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아니 친절은 고사하고 무자비하기까지 하다. 시간은 피도 눈물도 없다. 그래서 환영에 불과하다는 석학의 진단도 조금은 미심쩍기만 하다. 환영-실체가 없는 그림자라니? 실질적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고 다리를 놓아가며 우리를, 아니 만휘군상을 시간의 발밑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게 시간이지 않는가?

우리가 현재라고 의식하는 시간은 단 3초라고 한다. 3초건, 30분이건, 3시간이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가차 없이 가혹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허송세월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다만 현재는 선물일 수도 있음에 희망이 있다. 몇 해 전 베스트셀러였던 <선물>이라는 책의 주제가 그것이다. 현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 present에는 현재의, 제시하다, 선물하다, 보여주다뜻이 함축되어 있다.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을 분석하면 왜 그런 뜻이 함께 들어 있는지 짐작이 간다. pre[앞에]+esse[.있다]+ent[상태]=present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다. 시간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인생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엄격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나의 됨됨이를 현재에 맞춰 살 수만 있다면, 그런대로 한 인생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의 덤에 기대어 사는 우리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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