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신문, 저널리즘의 의무를 다하자
지역신문, 저널리즘의 의무를 다하자
  • 신영배
  • 승인 2023.01.0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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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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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전북지역 언론계에서 존경받는 선배와 술자리를 했다. 선배는 신문사 운영이 어렵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이어 전주일보 인터넷판에서 필자의 칼럼을 읽고 있다며 격려했다.

선배는 시종일관 지역신문들의 보도 행태를 지적했다. 어느 신문을 지칭할 것 없이 모두 자치단체 홍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며 혀를 찼다.

신문마다 같은 기사가 실리고 제목도 거의 비슷하거나 아주 같은 경우도 많다며 보도자료를 보고 똑같이 쓰는 거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자치단체는 물론이고 일선 기관 등에서 기사를 만들어 출입기자들에게 동시에 보내고 있다고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배는 지난날에는 경쟁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를 놓고 낙종한 신문사의 데스크 등은 불같은 호령은 물론 아예 출입처를 바꾸어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보도자료를 통해 기사를 작성하니 낙종할 일은 없겠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날 취재를 위해 남의 집 담을 넘기도 했다는 일화까지 꺼내며 요즘 언론은 완전히 출입처의 홍보요원이고 나팔수인 듯하다고 탄식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필자로서는 퍽 난감한 말들이 지적되었고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작금의 언론 환경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면 선배가 어찌 나올지 몰라서, 아니 실망하실 것 같아서 아픈 질문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얼버무리고 헤어졌다. 선배와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진땀이 났다. 듣는 이야기가 모두 나를 나무라는 말로 아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선배가 지적한 내용 가운데 내게 가장 아프게 다가선 이야기는 지역 언론들이 행정기관의 일을 부풀리고 왜곡해 지역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정리하면 지금 우리가 지난 시절의 신문에서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왜곡하게 되면 그 내용을 후세 사람들이 믿게 된다는 말이었다.

집에 돌아와 선배의 지적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동안 나는 얼마나 사실과 진실에 가까운 기사를 썼는지. 전주일보는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성찰했다. 그리고 그런 잘못들을 모두 경영 차원이라며 합리화했는지도

전북의 경우 이렇다 할 기업이 없다. 그래서 지역신문의 주 수입원은 행정기관의 홍보 광고와 애독자의 후원 등으로 수익구조가 이뤄지고 있다. 자치단체는 업적을 홍보해 주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하기에 언론과 지방자치단체는 악어와 악어새 사이와 같은 구조다. 결국 서로 이익을 챙기며 상생하는 사이로 변화한 것이다.

기자(記者)가 자신이 출입하는 기관의 기사를 쓰면서 뭔가 성과를 올리기만 해도 쾌거라느니, ‘등극따위의 단어로 칭송하고 찬사로 장식한다. 지난날이라면 가십(gossip)거리도 안 될 단체장의 의례적 움직임이 머리(top)기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뭔가 비정상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일이 있어도 그 내용을 파고들거나 발견한 사안을 문제 삼지 않는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지, 정말 감각이 무뎌져서 감지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태평하다.

기자(記者)는 일반 시민이 보지 못하는 점을 쉽게 찾아내고 문제의 핵심에 빠르게 접근해 내용을 파악하고 그 사실을 재빨리 보도하는 직업이다.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고 수없이 경험하면서 감각이 남다르게 빨라진 직업군이다.

진실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정신이 기자 정신이다. 지난 시절에는 그렇게 좋은 기사를 쓰는 사람이 유능한 기자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기자보다는 출입처와 소속된 언론사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유능한 기자다.

촉이 좋아 쉽게 문제점을 찾아내고 기사를 잘 쓰는 기자는 외려 출입처로부터 핀잔을 듣고 위험한 인물로 찍히기 일쑤다. 기사보다는 광고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언론 현실이라면 변명처럼 들릴 터이지만, 타당성 있는 말이다.

이런 언론 현실이 지역신문들을 길들여 저마다 용비어천가를 부르기에 여념이 없다. 기자들은 스스로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출입처의 입맛에 길든다. 심지어는 기관장의 손아래로 기어들어 가기도 한다.

어느덧 받아쓰기에 익숙해져서 부르는 대로 받아 적고, 거기에 온갖 찬사까지 붙이는 일에 능숙하다.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생활인으로 월급을 받아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온갖 수모를 마다하지 않는 가장일 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으로 열심히 취재 활동을 하는 기자들을 매도하고 지역신문의 참상을 고해(告解)하자는 의미로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언론이 살아야 지역과 나라가 부흥한다. 언론이 살려면 기자의 저널리즘이 그 바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새 정부는 신년 기자회견도 하지 않았다. 문화방송 사태에서 경험했듯이 대통령의 언론관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중앙 언론만 아니라 지역 언론도 뭔가 예감하고 대응해야 살아남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미리 스스로 돌아보고 방향을 생각하고 대응책도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공통의 현실을 짚어보았다. 그러면서 과연 앞으로도 쓰다듬어주기를 기대하며 손 밑에 자진해 들어가는 고양이로 지낼 것인지, 그래야 살아남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변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80년대의 언론으로 남아 화석(化石)처럼 웅크려야 하는지도. 순치(馴致)된 기자와 주판알 튕기는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뱃살이 두둑해지던 시절은 이제 지난 시절로 묻어두자. 

이제는 언론 본연의 모습을 생각하며 보름달을 향해 우짖는 늑대처럼 '진실의 소리'를 부르짖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론의 상징이자 전부인 기자(記者)는 죽음 앞에서도 저널리즘의 사명을 다해야 시민에게 존중받을뿐아니라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론인 모두가 잊어서는 안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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