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가 당한 간접 프리킥”
“우리의 역사가 당한 간접 프리킥”
  • 김규원
  • 승인 2022.11.28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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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좋은 삶-85

 

튀김을 먹다가

간장을 엎질렀다. 기울어지던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에 힘입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막강한 전력의

 

브라질 팀이

우리 편 문전을 향해서

간접 프리킥을 차려는 순간

사타구니를 쥐어짜듯 감싸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1919. 3. 1.

1945. 8. 15.

1950. 6. 25.

1961. 5. 16.

 

한 접시의 식어 버린 튀김들

질질 흘러내리는 간장에

주눅이 든 채로

여전히

 

-장경린(1957~. 서울)간접 프리킥전문

 참 재미있다. 이렇게 읽는 재미가 있어야 시詩다울 것이다. 시詩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적 생산물 중에서 그 정신면으로 볼 때 가장 첨단에 있어야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詩를 가리켜 새로움의 새로움이라고 한다. 새롭다는 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시다. 정신력으로 본다면 예술의 첨병이요 전위가 되기를 시는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새로움 위에 다시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시가 타고난 운명, 새로움 때문에 시인다운 시인이라면 자신의 대표작을 꼽아 달라는 요구에 회자되고 있는 자신의 유명작품은 제외한다. 그리고 대표작이라고 꼽는 대답이 한결같다. ‘오늘 아침에 쓴 신작’[고은]이라거나, ‘지금부터 새로 쓸 작품’[옥타비오 파스]이라거나, ‘오늘밤에 새로 쓸 것’[박목월]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품일지라도 그것은 새로움의 새로움이라는 시의 참신함에 저촉되기 때문일 것이다.

 

  참 씁쓸하다. 한 편의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아이러니가 그렇다. 앞에서 말한 재미있다씁쓸하다는 어쩌면 정 반대의 감정이다. 재미있는데 씁쓸하다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즐겨 쓴다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감정이 그럴 것이다. 시가 보여주는 새로움에 새로움을 시도한 표현의 참신함에서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그 재미가 담아내는 시적 진실이 그저 재미만으로 읽고 말기에는 슬프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 때문이며, 그 아픔이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역사의식의 발로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니 느낀다. 시는 감정의 산물이다. 시가 아무리 냉철한 이성적 인식의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가 빌려 쓰고자 하는 것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이성으로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이성은 불변을 지향하지만,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하다. 시는 그런 감정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담아내려 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기울어진 식탁에서 튀김을 먹다가 간장을 엎지른다. 이 실수를 축구에 있어서만은 세계 최강인 브라질 축구팀에게 간접 프리킥을 당했다는 설정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간접 프리킥을 막아내기 위해서 일렬로 늘어선 형태를 우리 역사의 사건들로 병치시킨다. 강적의 간접 프리킥을 막아내려 안간힘을 다했던 민초들의 역사적 사건들 하나하나는 3,1운동, 8.15광복, 6.26동족상잔, 5.16군사혁명 등, 기울어진 운동장[식탁]을 벗어나고자 열망했던 민초들이 겪은 참혹한 역사의 아픔이다.

 

 그런 고통마저 시는 정면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반어와 역설, 아닌 보살과 이종결합異種結合을 통해서 오버랩 시킨다. 그래서 읽고 나면 웃픈 현실이 된다. 웃자고 하는 농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울자고 하는 신세타령[]도 아니며, 정색한 채 침 튀기며 하는 역사교육[]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바로 독자의 심금[감정선]을 건드려 보자는 것이다. 그런 감정의 현이 울린 만큼 독자의 심연을 울려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간직한 감정의 샘[深淵]을 울린 만큼 사람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2022카타르월드컵(2022.11.19.~12.19)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시가 추억을 불러와 옛 노래를 부르건, 미래를 끌어다 이상향을 그리건, 기본 발상은 언제나 지금+여기를 담아낸다. 이 작품도 그렇다. 비록 신라가 외세를 빌어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보면 간접 프리킥으로 어처구니없는, 먹지 않아도 좋았을 골을 먹은 형국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3.1운동은 어떤가? 외세를 등에 업은 자들은 나라와 겨레를 파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작 그 외세를 막아내기 위해서 민초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총칼 앞에 맨손에 태극기로 맞섰다. 기울어져도 한참 기울어진 역사의 운동장이었다. 그러니 간장이 엎질러지듯이 역사의 흐름이 뒤바뀔 수밖에, 8.15광복도, 6.25동족상잔의 비극도, 5.16쿠데타도, 민초들만이 사타구니를 쥐어짜듯 감싸고/ 일렬횡대로 늘어선꼴이 되었다.

 

 이 작품의 시적주체는 누구일까? 그것을 읽어내는 감수성의 핵심은 풍자이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능력은 바로 역사인식이 될 것이다. 역사의 진실마저도 시적 풍자 앞에서 한낱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웃음에 숨겨둔 날카로운 비판정신은 시의 매력이다. 웃음 뒤에 숨겨둔 서릿발 같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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