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뫼, 살아서보다 오히려 죽어서 세상을 만든다”
“묵뫼, 살아서보다 오히려 죽어서 세상을 만든다”
  • 김규원
  • 승인 2022.10.17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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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좋은 삶-79회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 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신경림(1936~ 충북 중원)묵뫼전문

허묘(墟墓)’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풀에 묻혀 폐허가 된 무덤을 이르고, ‘묵무덤은 오래도록 돌보지 않아 거칠게 된 무덤을 이른다. 그렇다면 묵뫼는 이 둘의 의미를 포함하여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게 된 무덤이다. 이런 무덤들은 야산에 흔해 공동묘지라는 말도 같은 뜻을 지닌 어군에 속할 터이다. 분별하여 쓰일 경우도 있겠으나, 굳이 가리자면 묵뫼라는 음성영상이 말의 뜻과 어울려 마음을 끄는 말이다.

요령잡이는 상여가 나갈 때에 요령을 들고 만가를 선창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말강구(말강고)’는 싸전(쌀가게)에서 말[]로 곡식을 속임수로 되어주고 구전을 먹고 사는 악질 반동을 말한다. 그들뿐이 아니다. 북도가 고향인 인민군 간호군관, 다리 하나 잃은 소년병, 나무꾼도, 등짐장수도 함께 누워 있다. 나와 나를 가리지 않고, 좋은 이와 나쁜 이를 분별하지 않은 채 묵뫼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다양하다.

사람만이 아니다. 묵뫼 위에는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비롯해서,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함께 있거나, 심지어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들도 불러 모으거나, 그들과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있다.

그런 다음-그렇게 함께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있는 묵뫼를 본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고, 장삼이사(張三李四)라고 다를 리 없다. 누구나 한번 오면 가야하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무덤이 있다. 그 한평생을 어쩌지 못해서 누구는 누구에게 원수가 되고, 또 누구는 누구에게 은인이 되기도 한다. 그 짧은 한평생을 어쩌지 못해서 누구는 누구 가슴에 못을 박고, 누구는 또 누구 가슴에 박힌 못을 빼는 사랑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사람의 종착점이 결국 묵뫼인 셈이다.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붉은 가슴을 내려놓고, 혹은 뜨거운 머리를 식힐 뿐이다. 비로소 하얀 이마를 맞댄 채 이웃사촌으로 누워~’ 있을 뿐이다. 시는 누워~’로 끝난다. 그 다음이 없거나 생략한 것이 아니라, 무량한 세월 속에서 모두가[은원(恩怨) 간에, 피아(彼我) 간에, 선악(善惡) 간에, 심지어 생물과 무생물 간에] 하나 되는 하얀 세월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을 외면한 채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한사코 비뚤어진 길로만 나아가려 할까? 여기에서 비뚤어진(?)’이라고 표현했다, 누가 보기에 비뚤어져 있단 말인가?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곧 그 가 문제다. 에는 ‘~라는, 소유를 나타내는 토씨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나의~’ ‘나만의~’ ‘내 것~’으로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 비뚤어졌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은인과 원수도, 아군과 적군도 모두가 소유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소유하는, 혹은 소유해야 하는 것은 좋은 것이요, 옳은 것이요, 은인이요, 아군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소유하지 못했거나, 혹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은 나쁜 것이요, 틀린 것이요, 원수요, 적군이어야 한다. 이렇게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고 차별하는 가 문제다. 그 나만 아니라면, 그 나만 없어진다면 나누고 차별해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모든 차별하는 마음의 근원인 내가 없어지는 때가 언제일까? 이 작품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얀 이마를 맞대고 누워있는 때가 바로 내가 없어지는 때다. 그렇게 누워서도 산나물을 키우고, 그렇게 누워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며, 그렇게 누워서도 이름도 예쁜 새들을 불러들인다. 심지어 그렇게 누워서도 함께 세상을 만들고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드는 때다.

이상하다. 내가 없어져야 비로소 세상이 세상다워진다니! 아하~! 그래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하였구나.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살린다. 존재하는 것은 끝내 비존재로 사라지고, 비존재였던 것들은 마침내 존재하게 된다. 이 생각을 좀 더 끌고 가자면, 산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게 하고,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살린다.

그렇지 않은가! 산 사람들에 의해서 묻힌 묵뫼의 사람들이 산 사람들로 하여금 2천 년 전 노자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지 않는가.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은 격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묵뫼의 주인공이 될 줄은 까맣게 잊고 산다. 아니 잊으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보다 오히려 죽어서 세상을 만드는 역설, 그 잠깐의 인생에 어찌 네가 있고 내가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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