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승격을 반기며
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승격을 반기며
  • 김규원
  • 승인 2022.10.13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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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이 지난 12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를 열어 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지정신청에 대해 논의한 결과 사적지 지정을 최종결정했다고 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지만, 이제라도 웅치전투의 의미를 새롭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환영해 마지 않는다.

이에 따라 완주군 소양면 웅치 일원을 중심으로 진안군 부귀면 일대까지 총 231,556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사적지로 지정되면 정부의 지원으로 사적을 정화하고 역사 유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제반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15927월 왜군은 금산을 함락하고 나라 제1 곡창인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를 함락하여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려 했다.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고 전주를 빼앗기면 나라를 통째로 내주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이 1천 병력으로 1, 2, 3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총으로 무장한 1만 왜병에 맞서 싸웠다.

치열한 전투 끝에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지고 1천여 의병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웅치를 넘어 안덕원에 이른 왜군을 권율 장군과 황진이 물리쳐 이치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왜군은 막대한 전사자를 내는 바람에 전주성으로 진군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퇴각하던 왜장은 철수하면서 웅치에 가득히 널린 조선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큰 무덤을 만든 후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라는 나무 표목을 세우고 금산성으로 퇴각했다.

마주 싸운 왜장조차 감동한 전라도 의병과 관군의 충절이었다. 그들의 장렬한 희생이 없었다면 왜군을 안덕원과 이치에서 물리칠 수 없었고 곡창을 잃어 전쟁을 수행할 수도 없고 조선군은 재정비할 틈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웅치전적지의 사적 지정은 일찍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임진난 당시 웅치 전투에서 의병과 관군이 목숨을 던지며 싸워 승리하지 못했다면, 나라의 곡창이자 왕조의 발상지가 왜적에 유린되어 처참했을 것이고 왜병들은 호남평야의 곡식으로 풍족한 전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에서 이순신의 해군이 왜적을 막고 육지에서 웅치전투 승리가 있었기에 나라의 근본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어떤 사적지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권력에서 먼 사람들이 이루어낸 일이어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웅치전투가 영남지역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진즉에 성역화라도 되었을 일이지만, 늘 변방인 전라도 지역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던진 일이어서 무시되고 관심 밖의 일이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대한민국에서도 남의 일처럼 무시하다시피 내밀렸다.

늘 권력의 중심은 경상도와 서울에 몰려 있었고 나라의 먹거리를 대는 호남평야는 경계의 대상이고 깔아뭉개서 힘을 얻지 못하게 했다. 그역사의 흐름이 오늘까지 이어져 웅치전투의 의미조차 무시되었다.

이제 가까스로 사적지로 지정되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전적지 지정은 시작이다. 우리 스스로 스토리텔링을 구상하고 조상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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