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수표를 해독하는 시 읽기의 즐거움”
“난수표를 해독하는 시 읽기의 즐거움”
  • 김규원
  • 승인 2022.09.26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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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바다가 잠잠해서

 

-정끝별(1964~ 전남 나주)밀물전문

시를 읽는 일은 시의 암호를 풀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시의 암호를 해독하는 비밀번호는 순전히 밖에 감춰 둔 난수표亂數表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감수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체험이 발사하는 주파수의 파장과 감수성이 감응하며 정서를 자극하는 힘에 의해서 시는 그만큼의 비밀을 풀어놓은 비밀 지령이 된다. 이 짤막한 시를 접하면서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 또한 전적으로 나의 체험과 감수성이 수신해 낸, 난수표의 해독일 뿐이다.

우선 가장 먼저 잡히는 것은 가까스로저녁에서야이다. ‘가까스로는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 일[혹은 과정]을 겪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수식어다. 뒤에 나오는 저녁에서야와 결합해서 짐작해 보면 진술되지 않은 가까스로의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민완 형사나 탐정이 아니어도 짐작할 만하다.

[아침에 집을 나서 종일 세상과 관계하면서 꿀을 모으느라 온갖 험한 꼴, 갖은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길 수밖에 없었음]가까스로는 증언하는 셈이다. 그런 우여곡절迂餘曲折끝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헤매고 다니다가, ‘저녁에서야귀항할 수 있었음을, ‘가까스로저녁에서야가 협력해서 드러내는 셈이다.

귀항한 배는 두 척이었다. 그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고 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무사히 귀가하여 평안 모드로 회귀하는 그림이 선명하다. 그런데 조금 수상쩍은 대목이 있다. 그 두 척의 배가 벗은배라는 것이다. 더구나 두 배가 나란히 누워있다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있다고 진술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배를 연상하게 된다. ‘나란히 누워있다는 진술과,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있다는 진술을 거치면서 우리말의 ‘[]’도 있고 ‘[]’도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는 앎과 느낌의 전선을 타고 흘러드는 미묘한 감정까지 자극한다. 교묘하게 정치된 중의重意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되었음에 쾌재라도 부를까, 아니면 그 교묘한 중의의 함정을 발견해 내고는 자신의 섬세한 언어 감각에 대견함을 느끼게 될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그런 함정을 미리 발견하면서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있는 항구가 바로 안락한 침상 이미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삶의 구체적인 희열을 공유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이미지를 불손하게 말초적 관능미에 치우친 암호 해석이라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사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서로의 뱃머리를 부딪치며 출렁이는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날의 일과를 마친 다정한 부부가 따뜻한 침상에 누워 하루를 대화하며 엮어내는 모습과 그 이미지에서 일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있는 이미지를 부부애의 극치로 이끌어 낸 마이너스 상상력을 더해 준다고 해석한(송수권 시인) 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그려내는 그림이 이차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실은 이 시가 의도하는 플러스 상상력의 차원에서 보아야 더욱 밀도 있는 경지[시와 삶이 일치하면서 울려내는 감동]에 이를 수 있다고 보인다.

이 세상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험하기만 한가. 하루의 항해를 마치고 항구[침상]에 나란히 누워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 바다가 잠잠해서라는 위로의 언사 너머에는 밀물이 잠시 잠잠하지만, 언제 폭풍우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로 변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험을 예견하면서, 오늘 주어진 평안에 안도하는, 유보된 불안이 잠재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는-[애무愛撫 해주는] 부부 사랑의 극치에서 올 수 있음을 짐작하는 일은 시 읽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플러스 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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