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생태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 김규원
  • 승인 2022.09.0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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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귀뚜라미는 공양 중이다

 

사마귀가 작고 세모진 주둥이로 자신의 머리통을 야금야금 다 갉아먹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생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지 아니면 이미 도통한 선승이 한분 그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지 몸부림 한 번 치지 않는다 귀뚜라미의 몸이 사마귀의 몸으로 변하고 있다 먹히고 먹는 순간이 참 거룩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노래가

끝난 들녘은

시방

-이해완(1962~.)수묵담채 2전문

시조의 변형이 놀랍고 아름다우며 의미 깊다. 정형시인 시조를 엇시조로 탈바꿈하여 자유시의 경지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그저 생태계의 순환 과정이라고 치부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시인의 눈길이 바로 이 시를 낳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시인의 눈은 분명히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心眼-詩眼]임을 알겠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갖는 현상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그런 현상마저 깨달음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 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내공이 있어야 할까? 그 내공은 바로 세상을 심안-시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극 동토대까지 날아와서, 비교적 천적이 적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기러기 한 쌍은 둥지를 틀고 부화를 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곳이라고 천적이 없을 수 없다. 기러기가 낳은 알을 호시탐탐 노리는 북극여우가 있다. 기러기 부부는 여우의 침공에 그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편 채 공습경보를 내지르며 여우에게 총공세를 펼친다. 여우는 조금 물러나는 척하지만, 그 맛있는 먹잇감에서 쉽게 철수하지 않는다. 입 안 가득 기러기알을 머금고 돌아간다. 그래도 수만 마리 기러기들 중 겨우 몇 마리의 알일 뿐이다.

부부의 천신만고 보살핌 끝에 부화 된 기러기 새끼들은 솜털 뭉치에 불과하다. 북극여우들의 먹잇감 사냥은 멈추지 않는다. 먹이 사냥을 나갔다가 뒤늦게 돌아와 텅 빈 둥지를 보며 허망한 비감을 통곡하는 기러기 부부를 보란 듯이, 북극여우는 한 입으로 어쩌면 저렇게도 많은 솜뭉치를 머금을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기러기 새끼들을 몽땅 입에 물고 자신의 굴로 의기양양 돌아간다. 굴 밖까지 마중을 나온 북극여우 새끼들은 여러 날 굶주림 끝에 진수성찬을 맞는다. 모든 새끼들은 앙증맞고 사랑스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북극여우 새끼라고 다를 리 없다. 조금 전 그 어미가 기러기 새끼들을 사냥할 때의 미운 감정은 어디로 가고, 보는 나로 하여금 북극여우 새끼들의 포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한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요로는 살아 있지만, 우리나라 들녘에서는 자취를 감춘 따오기란 새가 있다. ‘멸종금수복원사업덕분으로 따오기가 우리나라 들녘에 방사되고 있다. 따오기 역시 부부금슬이 좋기로 유명하며, 사람의 생활환경 근처에서 서식하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특성 때문에 멸종을 맞았지만 방사한 따오기들 역시 동네 가까운 곳에 서식지를 정했다. 볼수록 소중하고 진귀한 손님만 같다. 제발 잘 정착하여 우리나라 산하에서 다시 그 정겹고 다감한 노랫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렵게 복원된 따오기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부화를 시작했다. 귀하고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고마움은 그저 인간의 것일 뿐, 아니 복원사업을 벌이는 일꾼들이나 그들을 돕는 몇몇 마을 사람들의 것일 뿐, 따오기의 천적들은 그저 또 하나 새로운 먹잇감에 불과했을 터. 뱀이 다녀가며 따오기알을 훔쳐 먹고, 너구리인지, 오소리인지, 아니면 삵인지, 천적에 맞서 둥지를 지키려 물러서지 않던 따오기를 주검으로 만들고 말았다. 짝을 잃은 채 홀로 마을의 논에서 먹이 활동하는 따오기가 안타깝고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기러기의 새끼들이 북극여우 새끼들의 몸으로 자라고, 따오기의 알이나 몸들이 천적들의 생명을 살릴지라도 인간이 간섭하고 조절할 방법이 없다는 것, 이 불변의 생태 질서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이 진실 앞에서 우리는 좀 더 숙연한 침묵의 교훈을 얻으면 다행일 것이다.

노래가/ 끝난 들녘은/ 시방/ / / / / 한 자 한 자 명토 박듯 힘주어 그려낸 세계의 침묵은 저들만의 것이 아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함께 삶을 포기한 세 모녀2014년 송파에서도, 2022년 수원에서도 되풀이된다. 저들의 죽음을 휩싸고 도는 차가움은 삶이/ 끝난 세상은/ 시방/ / / / / 인간의 삶도 생태계라는 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진정 벗어날 길이 아예 없는 것인가,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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