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한 사과(謝過)
정중한 사과(謝過)
  • 전주일보
  • 승인 2022.06.0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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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광 섭/수필가
문 광 섭/수필가

농협은행서 신용카드를 받아 가라는 연락을 받고서 찾아갔다. 창구는 한산해 보였어도 대기자는 7명이나 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일반예금 취급창구 세 곳 가운데 두 곳에서만 업무가 진행되고 한 곳은 출장이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곧 내 차례가 되겠지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10여 분이 지나도 내 순번은 그대로였다. 왠지 몰라도 진행이 더뎌서 다음 차례로 넘어가지 않는다. 슬며시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따지고 항의할 일도 아니어서 TV나 볼 요량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그 순간지금 뭣들 하는 거여? 30분도 더 기다렸어!”라는 고함소리가 사무실 안을 요동쳤다. 약주 한 잔 드신 듯 보이는 팔십대 노인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울분을 터트린 것이다. 카운터 뒤쪽에 앉아있던 간부가 달려 나와 무슨 일이냐고 용건을 묻고 직접 처리해주며 죄송하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갑자기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아 은행 안이 냉기를 자아냈다.

마치 내가 고함쳤던 당사자인 듯 쑥스러운 생각이 들며 잠시 치밀었던 부아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짜증이 쌓여 감정이 날카로워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또한 갈수록 편리를 추구하고 뭐든 빨라야 하는 시대에 기다리지 못하는 습성이 생기지 안았나 싶었다. 인심이 묻어나는 인간관계에서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로 변해가는 시대 탓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의 감정도 덩달아 메말라 가면서 참지 못하고 과격해지지 않았을까 여겨졌다.

30분이 경과할 즈음에서야 대출업무 담당자가 호출해 신용카드 수속을 처리해주며, “오래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고 서둘러 은행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얼핏, 화냈던 노인과 같은 심사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게 죄송하다고 말한 듯하다. 마음을 들킨 듯 찜찜하고 불편하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야 개운해질 것 같은 생각에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치고 세면대에 손을 씻었다. 손 닦을 화장지가 보이지 않아 손을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그때 화장실 관리자로 보이는 칠십쯤 돼 보이는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서며 나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바닥에다 물기를 털면 내가 또 닦아야 하잖아요?”

 “아이쿠!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얼굴이 화끈거려 뭐라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치 속담에 나오는 반찬 먹은 강아지꼴이 되었다. 한 번 더 고개 숙여 인사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문득 두어 달 전, 치명자산 성지 K 신부님이 봉사자들에게 하신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물기를 세 번만 털어도 화장지 한 장이면 충분하기에 절약할 수 있다라고 당부하신 걸 깜박 잊었다. 물기를 반드시 세면대에 털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나이임에도 생각지 못해 창피한 꼴을 당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신속하게 사과하고 두 번이나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 한 것에 위로가 되었다. 하마터면 자존심을 세우느라 물기 좀 털었다고 그렇게 성을 내느냐!’고 역정을 냈더라면 더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우리는 큰일보다 작은 일 가지고 다투고 싸우며 마음을 상하는 경우가 흔하다. 누군가 먼저 미안하다라거나 잘 못 했다라고 하면 끝날 것인데도······.

오늘 농협은행에서 노인네가 ‘30분을 기다리게 했다고 고함을 친 것부터가 잘 못 된 일이지만, 간부가 재빨리 나서서 죄송하다고 함으로써 슬기롭게 수습한 건 잘한 일이다. 만약에 지금 놀면서 안 해드리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했더라면, 한참 동안 시끄러웠을 것이다.

하루를 살면서도 사람이 누리는 감정에 따라 그날 그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도 만든다.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을 그 자신이 얼마나 잘 조절할 수 있느냐에 따라 하루의 행복이 달려 있다. 성현 말씀에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하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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