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젖은 삼천에 비가 내리고
봄빛 젖은 삼천에 비가 내리고
  • 김규원
  • 승인 2022.04.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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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비가 내린다. 봄빛 젖은 삼천에 비가 내린다. 무심코 서 있는 나무에도, 풀에도, 돌멩이에도, 내 마음 밭에도 봄비가 내린다. 삼천은 내리는 비로 인해 새롭게 눈을 뜬다. 지난가을 잎 진 뒤로 긴 겨울 동안 마름했던 파란 옷을 꺼내 놓으며 봄 잔치에 나설 채비다. 겨울은 뒤로 가고, 봄은 나직한 속삭임처럼 봄비를 타고 내게로 오고 있다

 

언덕 위에 산수유는 벌써 노란 등불을 켰다. 빗방울이 애무할 때마다 아주 작은 나팔 같은 입술을 살포시 열며 봄을 노랗게 물들인다. 작은 씨방 그 어디에 생명의 씨를 품고 있다 봄비 따라 돋아 올리는 부지런함을 배웠을까? 무시로 스며드는 한기를 홑 껍질 이불로 끌어 덮으며 봄비가 내리기를 고대했을 산수유가 가난한 소녀처럼 애처롭다. 산수유 하면 지리산 자락 산동마을이 떠오르는데 이곳 삼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질세라 매화도 분주하다. 연분홍 분 바르고 봄맞이 나섰다. 긴긴 겨울 추위 속에서 꽃망울을 보전하고 있다 봉긋하게 피워 올랐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쓰라린 아픔을 감내했는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야 봄이 오듯 매화도 그렇게 추위를 이겨냈으리라.

 

나는 매화를 좋아한다.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품격 높은 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릴 적 매화를 닮은 이웃집 소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시절의 감정은 여전히 내 가슴에 살아있다. 그래서 그럴까? 매화를 보면 가끔 마음에 잔물결이 일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서 좋은 것 같다.

 

길섶에 오밀조밀 피어난 풀꽃도 보인다. 보라색 조각별을 무수히 뿌려놓은 듯 작고 가녀린 꽃이다. 이름하여 봄 까치 풀꽃(개불알꽃), 한동안 잊고 지낸 인연을 만난 듯이 반갑다. 아직은 차가운 빗속에 떨고 있는 여린 꽃잎이 가엾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는데 왜 이리 서둘러서 일찍 피었을까?

 

연록 빛 쑥들도 보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듯 겨우 고개만 살짝 내밀었던 녀석들이다. 그런데 비 맞은 지 불과 몇 시간인데 진녹색 잎을 손바닥처럼 폈다. 머지않아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할 테다. 누군가의 집에서는 국이 되어 입맛을 구수하게 돋게 할 테고, 누구의 집에서는 떡이 되어 온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정을 듬뿍 나누게 되리라.

 

기다란 가지를 휘휘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여유롭다. 녹색 옷을 입는 무희처럼 날렵해 보인다. 간혹 바람이 불면 늘어진 버들가지가 흥겨운 듯 춤을 춘다. 봄 타령 장단에 맞추더니 중중모리로 이어지는 춤사위이다. 한바탕 신명이 난 버드나무는 냇물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조선 시대의 풍류객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 한 수가 생각난다. 대동강 능라도에서 버드나무를 보고 읊은 시다. 물안개 머금고 있는 버드나무를 보고 춘정春情에 겨워 봄 풍경을 그려냈다.

<대동강 아가씨들 봄놀이 즐기려니 (패강아녀답춘양 浿江兒女踏春陽)

수양버들 실실이 늘어져 마음 애닮다. (강상수양정단장 江上垂楊正斷腸)

가느다란 버들 실로 비단을 짜. (무한연사고가직 武限烟絲苦可織)

고운 님 위해 춤 옷을 지으리라> (위군재작무의상 爲君裁作舞衣裳)

 

해 질 녘이면 버드나무 위로 화려한 군무를 펼쳤던 겨울 철새는 자취 없고 그 자리에는 백로 왜가리 등 여름 철새의 몸놀림이 분주하다. 신접 살림살이를 준비하는지 핑크빛 몸짓이다. 그들이 있기에 삼천에는 사랑이 익어가고 생명력이 넘쳐난다. 나무에서 돋아나는 잎새와 대지를 푸르게 물들이는 이름 모를 잡초들, 삼천에서 희희낙락 유희하는 철새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봄비는 겨울 동안 깊은 잠에 빠져있는 대지를 깨워 기지개를 켠다. 나무의 어깨를 두드려 잎을 돋게 한다. 풀잎 가슴을 어루만져 예쁜 꽃을 피우게 한다. 그리고 내 가슴 한편에 잠자고 있는 뭉근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소환하기도 한다.

 

내가 걷는 빗길에서 지난 세월의 빗길을 생각하는 사이 빗줄기는 더욱 굵고 세차졌다.

빗줄기가 긁어질수록 주변은 더욱 활기차고 꽃들은 그 향기를 더했다. 내 몸에도 생동감이 일렁이고 힘이 솟는다. 그래 봄비는 역시 소생의 활력소다. 봄비와 함께 내게 다가오는 새봄을 활기차게 맞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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