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이미지는 우리 삶을 신선하게 채색한다.”
“시의 이미지는 우리 삶을 신선하게 채색한다.”
  • 김규원
  • 승인 2022.03.06 2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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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오르면 몇 량()의 낡은 시간들을 떼어 놓고

달아나는 화물차가 보였네

풀섶 끝 샐비어 꽃들은 시뻘건 피를 억억 토()해 내고

저 아래 골짜기로만 주택들은 한 무더기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고 있네

어디선가 창백한 햇볕 하나가 질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네

 

-노향림(1942~ 전남 해남)교외전문

  매우 간결한 터치의 수채화-풍경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아니, 그런 수채-풍경화를 그리려는 내[독자]가 언덕에 올라 구도를 잡는 듯하다. 그럴 것이다. 모처럼 없는 시간을 내어 도시를 벗어났을 때, 어찌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교외는 郊外. 자는 성 밖, 국경, 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냥 교외가 아니다. 삶의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울타리를 친 그 이거나, 함부로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남의 나라쯤으로 여겨질 만큼 어려운 나들이길이거나, 아니면 현실에서는 섣불리 만날 수 없는 -종점의 감성이 일어날 만한 그런 곳이 바로 교외다.

  이 풍경화는 서정으로 그렸다. 그 서정이 다섯 개의 시점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활착된다.

  첫째 시점은 낡은 시간이다. 화물차가 떼어놓고 달아났음이 분명한 몇 량의 수레다. ‘은 수레를 세는 단위이지만, 수레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요즘 흔히 보는 컨테이너이거나 화물 짐짝임이 언덕에 오르니훤히 내려다보인다. 왜 교외를 찾은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화자의]낡은 시간을 떼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 경험에 미루어보면 그렇다. 현실의 중압감, 또는 지속되는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이 교외인 것은 자연스럽다.

  A.브르통은 이미지란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가지 현실을 접근시키는 데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미지는 순수한 정신적 창조물이라고 말한 이도 그였다. 화물차가 떼어놓고 간 화물 덩치[컨테이너]라는 현실과 일상이 주는 삶의 중압감을 떼어놓고 교외로 달려온 화자의 현실이 매우 온당하게 접근하여 새로운 정신적 창조물로서 이미지를 창출해 내고 있다. 간결하지만 아름답고 적절하여 공감할 수 있는 경지요 풍경이다.

  둘째 시점은 달아나는 화물차. 낡은 시간을 떼어놓고 줄행랑을 치는 화물차를 달아난다고 본 감각이 신선하다. 무슨 미련이 있어 멈칫거리겠는가? 무슨 연민이 있어 그 짐 덩어리에 연연하겠는가? 화물차가 아니어도 현실이 주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우리[시의 독자]는 달아나는 화물차를 언덕에 올라서 경쾌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치 화자 자신이 현실의 무거운 짐을 떼어놓고 교외로 달려 나왔듯이, 화물차의 꽁무니를 경쾌하게 관조한다. 시심으로는 직관의 경지일 것이다. 세 마디의 어절, 단 하나의 시행으로 더 많은 생각의 터치를 가능하게 하는 시의 경제학이 돋보인다.

  셋째 시점은 붉은 피를 억 억 토()내는 샐비어꽃들에 닿아 있다. 꽃이 지닌 농염한 선혈鮮血의 시각 이미지를 이처럼 선명한 청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니! 역시 시가 아니고서는 그릴 수 없는 이미지의 승리다. 샐비어꽃의 선홍鮮紅의 색깔은 그냥 빛이 아니라, 무슨 억하심정을 가슴에 지니고 다 말하지 못해서 붉은 피를 토해내는 형국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때는 샐비어가 피를 토하듯이 피어나는 초가을쯤이 아니었을까, 초가을이 아니어도 샐비어 붉은 꽃은 가을을 배경으로 피어야 제격이다.

  넷째 시점은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는 주택이다. 이는 전원을 찾아 교외로 나선 현물의 값에 해당하는 주택들이다. 다섯 가지 시점 중에서 집값을 들어 교외의 풍경을 진술한다. 시가 반드시 사실-팩트일 필요는 없으나, 우리의 실정에서 교외에 나가면 누구나 만나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니켈 주화의 값어치가 어떻게 매겨질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천만금을 주어도 시골을 무슨 오지奧地처럼 꺼리는 사람에게는 동전값의 헐값일 것이요, 기를 쓰고 탈도시를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금화金貨에 값하는 풍경일 것이다. 판단과 선택은 순전히 시 독자의 몫이다. 화자는 그런 교외의 풍경에 가치 판단 없이 그냥 진술해 낼 뿐이다. ‘쏟아지고있다고……

  다섯째 시점은 햇볕 하나에 닿아 있다. 햇볕은 집합 명사여서 하나, 둘 셀 수 없음에도 그렇게 진술한다. 그 햇볕이 창백하다는 수식이나, 그 햇볕이 뼈가 마른다는 술어는 모두가 햇볕 이미지를 확장시키기 위한 의도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교외에서 만나는 햇볕이 이 정도라면, 화자가 만나는 교외의 수채-풍경화가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이 아니라, 화자의 가슴 안에서 인화되고 있는 심화[心畵-마음그림]’임을 미루어 알겠다.

  교외 풍경화를 시적 진술을 통해 접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해 있을 상식적 풍경에 더하여, 시적 서정으로 그린 또 하나의 수채-풍경화를 간직하게 되었다. 시는 상식으로 주저앉는 현실의 삶에, 상상의 이미지를 덧칠하여 전혀 새롭고 낯설지만 신선한 삶의 전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팍팍하고 무거운 현실에 날것으로의 신선미를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시의 독자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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