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금오산에서
봄이 오는 금오산에서
  • 김규원
  • 승인 2022.03.0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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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 금 종 / 수필가
백 금 종 / 수필가

  가시가 찌르듯 날카롭던 추위가 한풀 꺾였다. 가녀린 샛마파람이 스며드는가 했더니 위세 등등하던 추위를 비집고 봄빛이 내려앉았다. 밤새 몰래 온 손님처럼 기척 없이 온 봄이다. 봄은 얼어붙은 강물을 풀고 골짜기에 알알이 박힌 얼음을 녹여 잠든 산천을 깨우고 새싹을 틔우느라 지친 몸을 대지에 뉜다.

  봄소식에 들썽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남녘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목에도 봄은 솜털 같은 촉수를 내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남해의 돌산도 끝자락 금오산이다. 금오산은 남해를 바라보며 마치 병풍처럼 길게 자리하고 있는데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비경이다. 산의 동녘 끝자락에는 처마 밑의 제비집처럼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향일암이 신비롭게 다가선다.

  어머니 품속 같은 산에 포근히 안겨보고, 일찍 찾아오는 남해의 봄 바다에 풍덩 빠져보고 싶은 금오산. 사람은 산을 만나야 신선()이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진정 쉴() 수 있는 공간은 자연 속에 펼쳐진 산이라는 말도 있다. 산이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순화하고 인간이 자연에서 비롯한 것임을 몸이 절로 알게 하는 순기능이 있음을 말한 것이리라. 휴식은 단지 쉰다는 의미를 넘어 수양이나 수련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 고승이나 현자들이 산을 찾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금오산은 그 산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풍광인데 새소리, 바람 소리뿐 아니라 비릿한 바다 냄새, 수평선에서 반짝이는 윤슬, 도도히 밀려오는 파도의 생동감, 한눈에 들어오는 크고 작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덤이다. 거기에다 몇십 길 절벽을 간신히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길에는 몸서리쳐지도록 짜릿함이 있다.

  우뚝 솟은 바위 턱 정상에 섰다. 남해의 포근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봄 바다의 싱그럽고 짭조름한 향기와 함께 봄은 수평선을 넘어 소곤소곤 그리운 소식을 전한다. 바다 건너 불어오는 바람 속에 봄을 여는 매화, 진달래, 살구꽃 씨가 만삭인 채로 들어 있으려니 싶다. 그 꽃씨가 남녘을 거쳐 머지않아 내가 사는 고장까지 밀려오겠지. 그땐 나는 가슴을 활짝 열고 그 황홀한 봄을 마음껏 끌어안으리라.

  가던 길을 멈추고 숲을 본다. 막 피어오르려는 듯 몽글몽글 맺혀있는 동백꽃이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 실눈 사이로 비치는 적자색 꽃잎이 너무 곱다. 아니, 곱다 못해 살짝 벤 하얀 살갗에 솟은 선혈 같다. 겨우내 참았던 그 고운 빛깔을 이제 내뿜어 나를 유혹하려는 걸까?

  동백꽃을 보며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면서 나도 꽃이 된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어찌 동백의 모습을 닮을 수 있으리? 내가 그들의 모습을 닮으려면 꽃과 같은 아름다운 마음과 향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에 맞추려면 내 눈이 그만큼 순수해야 하듯이. 모진 세상을 살면서 닳고 해진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는 욕심이다.

  보료처럼 깔린 낙엽을 제쳤다. 파란 싹이 보인다. 그 옆에 남해의 봄을 알리는 이름 모를 작은 꽃봉오리가 있다. 아직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갈색 아기 꽃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니 복수초인듯하다. 무심코 지나쳤더라면 볼 수 없었을 터인데. 아마도 복수초가 나 여기 있소.’ 하고 외친 건 아닐까. 볕뉘 한 줄기 받을 수 없는 나무 그늘에서 차디찬 겨울을 나고 꽃대를 밀어 올릴 수 있었던 멋진 봄의 전령사인 복수초의 생명력에 박수를 보냈다.

  금오산 막바지 벼랑길이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서로 엉켜 길을 내주지 않는다. 철제계단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바위틈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발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금이 저린다. 조금만 발을 삐끗하면 남해의 푸른 물에 풍덩 빠질 것 같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나 어쩌랴? 전진해야지. 결기를 다지고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드니 향일암이 눈앞이다.

  하루를 돌아보았다. 산이 가파른 등성이를 힘겹게 오르면 곧 내려가는 안이함을 안겨 주듯 위선과 교만과 탐욕을 버리면 겸손과 배려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조곤조곤 일러준다. 돌부리에 발끝이 채여 멍이 들고 나뭇가지에 긁혀 피가 솟는 그 지난함을 이겨내야 평탄한 인생 행로가 기다리고 있음도 산에서 가늠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뿌듯한 건 일찍 일어난 새가 먼저 모이를 찾듯남녘에 찾아온 푸른 봄의 기운을 흠뻑 얻어 충만해진 마음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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