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네!”
“눈 오네!”
  • 전주일보
  • 승인 2022.02.1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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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이번 겨울엔 눈다운 눈을 못 보겠거니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오후부터 눈이 조금씩 내리더니 새벽에 이르도록 내리고 있다. 창을 열고 밖을 보니 하얗다. 기다리던 눈을 모르는 체하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늦게 잠들어 잠이 고팠지만, 오랜만에 내린 눈이 날 부르는 걸 외면할 수는 없었다.

  집을 나서 새벽 시간, 눈이 소복이 내려 있다. 동녘이 희붐해질 시간이건만 눈구름이 덮여 세상이 캄캄하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인근 근린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 산책로엔 가로등 불빛이 새벽 기운과 눈의 차가움이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가 기대한 이상의 새벽을 맛보며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길을 걷다가 눈을 소복하게 얹고 있는 벤치를 만났다.

 

  눈 덮인 벤치의 눈을 털어내고 앉았다. 아련한 생각이 잠시 쉬어가라고 날 붙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퍽 좋아하던 여자, 아내는 눈이 많이 내리는 시골에서 자랐는데도 눈을 퍽 좋아했다. 늦여름에 처음 만나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다 지나기 전에 결혼한 것도 눈이 조화를 부린 때문이었다.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좋아하던 그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우내 우리는 눈 속을 걷고 눈 내린 벤치에 코트를 둘러쓰고 앉아 밀어를 나누며 사랑을 키웠다. 눈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 결혼 후에도, 나이 들어서도 눈이 내리는 날에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둘이 집 밖으로 나가서 거리를 헤매거나 눈 내린 벤치를 찾아갔다.

  그녀는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눈 오네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웬만한 일은 다 뒤로 미루고 아내와 눈을 맞으며 그렇게 나이를 먹어갔다. 내가 신문사에서 늦게까지 신문을 만들고 퇴근할 때도 그녀는 기다렸다가 함께 눈을 맞고 걸으며 집에 갔다. 눈 내린 날의 사랑은 오랜 그리움처럼 절실해서 더욱 행복했다. 우리는 눈 속을 걷고 뒹굴며 모든 것을 열어 맞이하는 진짜 친구였다.

  그녀가 아파 누웠을 때도 눈이 내리면 휠체어를 밀어 함께 눈을 맞았다. 그러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때부터는 밖에 데리고 가지 못했다. 눈이 내려도 즐겁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는 눈이 내리는 날 밖에 나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고 눈꺼풀만 여닫는 그녀가 겨울마다 내게 말하고 싶었을 그 말을 나는 지금에야 알아냈는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치달릴 즈음에 나는 벤치에 더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때, 요양병원의 의사가 추운 날엔 밖에 나가지 말라던 걸 곧이곧대로 따른 일이 후회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아내가 얼마나 눈을 좋아했는데, 그 소망을 내가 거니채지 못했다는 자책이 날 일어서게 했다.

 

  현실로 돌아온 내 얼굴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노랗고 파란 가로등 불빛에 쏟아지는 눈발이 어울려 동화 속 세상을 보여준다. 얼굴을 스치는 차디찬 눈을 맞으며 공원길을 몇 번이고 돌았다. 그녀가 떠난 뒤에 맞는 눈은 늘 내게 아픔이었다. 나 혼자 맞이하는 눈은 슬픔이고 회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리는 눈이 내게 포근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리는 눈 속에 어쩌면 아내의 육신이 산화하여 흩어진 분자로 섞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염원이, 말하지 못했던 갈망이 날 이른 새벽에 밖으로 이끌어 이렇게 눈길을 함께 걷자고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이 전율처럼 날 흔들었다.

  내가 혼곤한 새벽잠에서 깬 것이 그녀의 부름 때문이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오랜 그리움이 가슴을 치받아 기어이 한줄기 눈물로 솟아났다. 늘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날 내려다보고 감싸고 지키는 듯, 혼잣말처럼 그녀에게 말하던 언어들이 한꺼번에 눈송이로 만들어져 내렸다. 눈송이는 그녀가 떠나간 육신처럼 아무런 온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얼음 부스러기였지만, 내 뺨에 닿으면서 녹아 내 눈물을 닦으며 나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송이로, 빗방울로, 창문을 흔드는 바람으로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어쩌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도 그 끝자락을 밟고 있는 건 그녀이고, 허전한 마음에 세상을 보러 나설 때도 그녀는 내 가방 속에서, 스마트 폰 속에서 불쑥불쑥 나와 내게 말을 건다. 어느 때는 하이힐 소리로, 티 없이 웃는 웃음소리로, 아련한 체취의 기억으로, 아픈 그리움으로 내 가슴을 찢고 나와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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