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 · ­시정신은 생존의 에너지다!”
“예술혼 · ­시정신은 생존의 에너지다!”
  • 전주일보
  • 승인 2022.02.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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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희 시인은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촌평했다. “이 시 속에 정부는 틀림없이 숨겨둔 사랑 정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는 그런 단답의 얌전한 요조가 아니다. 맘껏 다른 것을 상상해도 좋으리라. 신성한 그 무엇 혹은 예술혼藝術魂(?) 그래도 나는 정부政府보다 정부情夫를 갖고 싶다. 악마가 있고, 죄가 있는위험하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거나 다크호스dark Horse라는 말이 있다. 앞의 뜻은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는 뜻으로,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향상된 것을 이르는 말이고, 다크호스는 선거나 경기 등에서, 예상하지 못한 힘이나 실력을 가진 후보자나 선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두 말을 떠올린 것은 평소에는 그저 빈둥거리며 할 일 없는 한량처럼 보이지만, 절치부심切齒腐心-이를 갈면서 속을 썩인다는 뜻으로, 매우 분하여 한을 품음을 이르는 말], 안으로 실력을 쌓아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생각나서다.

  예술이라 칭해지는 모든 창작행위는 밖으로 드러나는 연마와 단련과 훈련만으로는 남을 놀라게 할 수도 없고, 타인을 긴장하게 할 수도 없다. 남은 고사하고 심지어 자신마저 본능과 타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마치 악마에 씐 듯이 악착같은 자기 면려勉勵가 없이는 단 한 쪽지, 단 한 꼭지의 창작에 이를 수 없다. 예술 창작의 됨됨이가 그렇다.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딸의 고막을 찢은 아비의 심정[서편제], 자화상에서 귀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지적에 자신의 귀를 잘라서 대조하고야 마는 화가 반 고흐, 귀가 들리지 않는 처지에서 인류 최상의 음악 제9번 합창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 신분제의 사회적 굴욕 속에서도 예술혼을 극대화한 화가 장승업, 광기와 자기도취, 접신과 무아의 경지에 이른 폴 발레리, 랭보, 보들레르같은 시인들, 우리의 시인 김수영이나 이상 등의 창조적 예술가들에게서 그리운 악마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반어와 역설은 시법의 핵심이다. 우리 둘 사이 가졌으면 좋을 암호는 무엇일까? 시인이 보내는 시적 메타포metaphor를 제대로 해석하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갖는 것이 아마도 모든 시인들의 꿈일 것이다. 그렇게 소통했을 때 감지하게 될 즐거움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한 편의 시는 한 덩어리의 은유다. 은유의 맥락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서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시인이 타전하는 암호를 해독하며 시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독자, 시인은 그를 정부가 아니라 악마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모순형용 역시 시법의 골격이다. ‘그리운 악마’ ‘죄의 달디 단 축배등은 모순형용[어법]의 향연답다. 입에 올릴수록 맛깔스럽고, 귀에 담을수록 향기롭다. 시심이 마련한 창[]은 뚫지 못할 방패[]가 없고, 정서가 장만한 방패[]는 막아내지 못할 창[]이 없다. 이 찬란한 모순의 향연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만 즐거운 세계를 체험케 한다. 이 부정 교합한 언어의 퍼레이드는 악마조차도 두렵지 않은 정부이며, 죄조차도 부끄럽지 않은 용기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앞에서 열거한 악마성의 천재들이 이루어 낸 세계를 추체험할 수 있다면, 죄책감 혹은 당혹감은 오히려 아름다운 축복이 될 것이다. 모순이 오히려 새로운 미감을 낳는 세계, 그게 바로 예술의 창작혼이요, 시법의 요체다.

  그러므로 시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아닌 보살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행위다. 자기 규제의 윤리에 갇혀서, 자기통제의 규범에 얽매어 지레 겁먹고, 지레 위축되는 동안, 우리의 심장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 간다. 이럴 때 창조적 예술혼은 시들어 가는 심장을 뛰게 한다.

  생존의 환희, 정신의 승화, 구원久遠의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누구와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올곧고 고고하며 불멸의 자기 승화의 결정체시정신詩精神뿐이다. 그래서 그리운 악마란 결국 삶에 찌들고, 세월에 퇴색되며, 온갖 욕망의 굴레에 얽매인 자아를 벗어던지고, ‘젊은 심장을 맥동하게 하는 창작혼이요-생존의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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