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꿈을 보여주는 뜻 있는 창이다”
“시는 꿈을 보여주는 뜻 있는 창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2.01.17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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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을 제 몸에

한 획도 새길 수 없는

바다는

백지를 함부로 펼치지 않는다

 

글자 하나하나를 느리게 읽는다

그 속도로 수평을 이루는 고집이 있다

 

꽉 다문 상처는 뼈가 되기도 한다

 

-김영(1960~ 전북 김제)항해일지전문

 

시는 비유다.metaphor’

이 말은 비유가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의도적으로 비유하지 않은 문장을 구사한다 할지라도 시라는 형식의 글은 일단 비유한 글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유는 시의 뼈대를 이루는 머릿돌인 셈이다. 주춧돌 없는 건축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언어의 구조물인 시는 비유라는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져 서정이 거처할 수 있는 언어의 건축물이 된다.

사람들은 간결한 비유로도 의미 깊고 아름다운 서정의 건축물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시의 가치는 높게 평가받는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망처럼 그런 언어의 건축물은 쉽게 지어지지 않는다. 시의 태생적 됨됨이가 그렇기 때문이다.

빈틈없이 섬세한 설계도와 KS마크를 단 품질 좋은 재료를 써서 성실하게 시공한다 할지라도 탐탁한 서정의 공간이 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시는 의도하지 않은 의도가 시인의 찰나적 서정의 섬광과 만날 때 비로소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다양한 비유를 구사한다. 가장 흔하고 쉽다고 여기는 비유가 직유다. 드러내고자 하는 본래의 시상[원관념]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닮았다고 여기는 다른 사물[보조관념]으로 드러내는 수법이다.

직유는 이 비유 사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듯이, 처럼, 같이)가 있다. 그래서 시의 독자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놓인 서정의 강물을 이 징검다리를 통해서 건널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 수준과 고급한 감성은 어지간한 직유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 두 관념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를 치워버린 비유를 채택하기도 한다. 이를 은유라고 한다. 은유는 본래의 시상을 시인이 생각해낸[창조한] 다른 사물들과 알게 모르게 연결해 냄으로써 성립된다.

그런데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사이를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치워버렸기 때문에 독자들은 조금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서정의 강물을 건너가는 데 있어 이 정도의 난관쯤은 오히려 미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모험가들은 동네 도랑물을 건널 때보다 오히려 물살 거센 대하를 건너며 짜릿한 스릴을 맛보듯이, 시의 독자들도 어느 정도의 난관이 있는 지적 모험을 즐기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 모험을 만족시키려 시인들은 은유이되 원관념을 아예 치워버리고 보조관념만으로 된 시를 쓰기도 한다. 이럴 때 직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세계임은 물론, 은유와도 차림새가 전혀 다른 언어의 건축물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비유라는 첫머리의 진술을 기억한다면, 이 또한 시의 주류가 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런 은유를 통해 사람들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낯설고 의미 있는 아름다움을 만끽하곤 한다.

이 '항해일지'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원관념-시인의 시상은 온전히 감추고 그 시상을 시인의 진술만으로 채운다. 이 작품의 시적 진술은 온통 보조관념 일색이다. 그렇다면 원관념은 어디에 숨겨뒀을까? 이를 찾아가며, 그 안에 숨겨둔 삶의 비밀 아닌 비밀을 음미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일이 곧 시를 감상하는 길이다.

항해일지는 곧 삶의 기록이다. 시적 화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시인이 곧 관찰자 시점에 있음을 함축한다. “(시인은) [목숨]를 타고 바다[세상]을 항해[생활]하며 일지를 쓴다.”(시에서 숨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 ]로 묶어서 재구성했다.) 원관념 바다를 혹시 시적 자아로 착각할 일은 아니다시적 대상일 뿐이다.

항해자[시적 자아]함부로 백지를 펼치지 않는바다[세상]을 섣불리 읽을 수 없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백지수표를 건네지 않는다. 뜨거운 땀과 때로는 상처와 피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제 이름을 제 몸에/ 한 획도 새길 수 없는”) 바다[세상]’글자 하나하나를 느리게 읽어야하고, 그 느림의 철학으로 항해하노라면, 파랑 많은 바다[세상]도 잔잔해 지리라[수평을 이루며] 고집스럽게 나아갈 뿐이다.

그러자니 꽉 다문 상처는 뼈가 되기도하지 않겠는가. 바다를 항해하는 자의 온몸은 소금기 버석거리는 뼈의 고갱이가 될 것이다. 정신이 될 것이다그렇다면 세상과 삶을 온통 은유의 맥락 안에 갈무리한 이 작품을 음미하며 거두게 될 미학적 감동은 무엇일까?

시 정신말고는 신통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세상은 땀 흘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세뇌한다. 또한 빠르기가 곧 가치라며 앞으로 달려가기를 부추긴다. 그러자니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저 결승선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를 승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럴 때, 시를 심미적 정서로 공감하는 독자들은 시 정신이 지향하는, 느림과 평등한 공동체를 항해하는 꿈을 꾼다. 시는 꿈을 잃어가는 세상에 꿈을 보여주는 뜻 있는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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