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
  • 전주일보
  • 승인 2022.01.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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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그 무렵엔 정말 추웠다. 아침에 세수하고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쇠 문고리에 쩍쩍 들러붙었다. 전주천에는 얼음이 얼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옷이래야 홑겹 면바지에 학생복 저고리를 입은 정도였고 메리야스라고 불리던 구멍이 나서 몇 번씩 기운 속 내의를 입는 게 고작이었다. 간혹 털실 손뜨개질로 만든 조끼나 셔츠를 입은 아이도 있었지만, 형편이 좋은 집 아이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겨울에 전주천에서 썰매를 지치다가 얼음이 녹아 꺼지는 바람에 썰매를 탄 채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간신히 얼음구멍을 찾아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입은 옷이 얼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추웠다. 100여 미터를 걸어 집에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춥던지 이가 딱딱 부딪히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옷이 얼어 버석거리는 바람에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무서운 아버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사랑채 동정을 살피다가 가만가만 걸으니 더욱 추웠다. 간신히 뒷방에 숨어 들어가 옷을 벗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도 한참이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때서야 몸이 아랫목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고 손발에 조금씩 감각이 살아났다. 따뜻하다는 걸 느끼고 이제 살았구나싶었을 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겨울바람은 북쪽에서 살을 에듯 부는 삭풍(朔風)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년간 매년 겨울이면 삭풍을 마주하고 학교에 갔다. 서릿발이 버석거리는 길, 내린 눈이 녹았다가 얼어 군데군데 빙판을 이룬 길을 삭풍을 밀치며 걷는 등굣길은 너무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겨울방학이 오면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다렸다. 전주천이 얼어 썰매를 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추위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냇물이 얼어 썰매를 탈 수 있을 만큼 되면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썰매에 앉아 송곳으로 얼음을 찍어 속도를 내어 달리면 얼음이 ’ ‘쩌정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침을 먹자마자 몰려간 아이들은 낮이 되어 얼음이 녹아 얇아지기 시작하면 슬슬 집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썰매를 지쳐 지나가면 얼음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조금씩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 속도가 느리면 썰매가 물속으로 빠지므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흥청거리는 얼음 위를 달리며 느끼는 스릴은 짜릿했다. 얼음이 더욱 얇아져 위험해질 즈음엔 한두 명만 남아 스릴을 즐겼다. 그리고 제방 위엔 아슬아슬한 아이들의 모험을 구경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엔 얼음이 꺼지면서 누군가 한 아이가 물에 빠지고 짜릿한 쇼는 끝이 났다.

 

  잠들었던 나는 갑자기 누군가 날 껴안는 바람에 깨었고 얼굴에 닿는 감촉이 아버지의 수염인 것을 알고는 혼비백산 지경이었다. 그래도 눈을 뜨지 못했다. 썰매 타다가 물에 빠져 돌아왔으니 혼찌검이 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서운 아버지가 알았으니 난 죽었거니 생각했다.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보니 안채에서 내려가 사랑채 목욕탕이다. 아버지는 날 따끈한 목욕탕에 들여놓고 당신도 옷을 벗고 들어와 날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날 데리러 냇가에 나왔다가 내가 얼음구멍에 빠졌다가 썰매까지 챙겨서 나오는 걸 보고 얼른 집에 돌아와 목욕물을 데워 언 몸을 풀어준 것이다. 그러면서 얼음구멍에서 얼른 나오지 않고 썰매까지 챙겨 나온 일은 위험해서 걱정했다고 말하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며 꼭 안아주었다.

  그 뒤에도 두어 차례 얼음 속에 빠졌지만, 깊은 물에는 들어가지 않아서 아랫도리만 적시는 정도였다. 60년도 더 지난 아득한 일인데 지금도 추운 겨울이면 그때의 따뜻한 목욕물과 아버지의 수염과 품에 안겼던 감각이 고스란히 돋아나는 듯하다. 내가 가끔 추운 겨울날에 전주천을 찾아가는 이유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적은 60대 후반에 저세상으로 떠나신 아버지, 9남매를 길러내느라 엄격할 수밖에 없던 당신의 심경을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기온이 내려가고 전주천이 꽁꽁 언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이번 주말에는 전주천엘 찾아가 얼음 밑에서 헤엄치는 피라미, 모래무지, 동사리도 만나보고 그 시절처럼 삭풍을 안고 북쪽을 향해 걸어보아야겠다. 그래야 훗날 아버지를 만나면 전주천 겨울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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