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움의 생명력은 사랑이다”
“사람다움의 생명력은 사랑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2.01.0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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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코 죽기 살기로 정붙이고 사는 세상이다 햇살도 공작처럼 꽁지 펴주고 달빛도 으스스한 성황당길 마중 나가 주고 풀도 얼키설키 약 차올라 짱짱해야 결초보은 할 수 있다 진드기도 징그럽게 붙어먹고 산다고 핀잔 들어야 찐드기다 사람들도 그대 이름 하늘처럼 푸르게 푸르게 불러주지 않으면 눈 밝은 하느님도 잘 모른다.

 

-김남곤(1938~ 전북 완주)함께전문

문학을 허구虛構의 산물이라고 한다. 픽션fiction이라는 것이다. 허구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들었다는 것이고, 픽션은 사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쓰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시나 소설이나 허구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나 픽션이라는 말은 시보다는 소설을 설명할 때 주로 등장한다. 둘 다 정통 문학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다름은 필자를 호칭할 때도 드러난다.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하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부른다.[작가는 시인이나 소설가 등 필자를 아우를 때 쓰이기도 한다.] 모두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들인데,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붙여 시인이라 부르고, 소설을 짓는 사람에게는 집[]를 붙여서 소설가라고 부른다. 실은 이 호칭에서 시와 소설이 문학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별성을 가지게 되는 착안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짐작한다.

즉 시는 사람이 쓰는 것이고, 사람다움을 찾으려는 사람이나, 사람다움에 가장 높은 가치와 의미를 두는 사람이 쓰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점에 문학적 지향성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비해 소설가는 시가 지향하는 사람됨의 의미와 가치를 차선에 둔다기보다는 이야기꾼이라는 품격으로 먼저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의미의 선택은 작품과 독자의 몫이다.

이런 변별성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시보다 먼저 이 시를 쓴 시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자가 문학의 근육이 빈약할 때, 즉 문학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치열함보다는 치기 어린 문단 언저리에 맴돌며 시 정신의 군불을 지필 때부터 김남곤[아호:楠耘남운] 시인을 가까이에서 사숙해 온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시에서 비유를 통해 은유metaphor하고 있는 진술이나, 이 작품의 내면에 도도히 흐르는 시 정신이 허구적 상상이 아니라 육성으로 들려왔다. 시를 만들기 위해 허구적으로 동원한 진술이 아니라, 사람을 앞에 두고 차분히 삶의 길을 제시하는 선각자나 현인의 목소리로 들렸다. 상상으로 그려내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하라는 가르침이 아니었다. 남운 시인이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삶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다움이란, 시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한 사례라는 뜻이다.

필자가 겪은 바로 보자면, 남운 시인은 그런 실천적 삶을 살아왔다. 그런 지향성으로 일관하고 있는 작품의 맥락을 요약하자면 사람은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 ‘사람은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답고, 그래야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으며, 그래야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운 시인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후배에게도 서슴없이 먼저 안부를 묻는다. “요즈음은 왜 얼굴 보기 어려운가?” 이런 안부의 내력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의외의 맥락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면 송구한 마음보다 감동 세례를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우 해온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이 모두 시큰둥해져서 문단 출입을 삼가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안부를 물어주시며, 일으켜 세우려는 배려가 담겼음을 알기 때문이다. 연장서열을 불변의 질서로 여기는 우리네 풍경으로는 짐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남운 시인은 지역 문인들이 보내는 저서는 꼭 읽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필자가 몸소 겪어서 안다. 내 시집 등 졸저를 우송하면 언제나 독후감을 전하고, 특별한 대목을 지목하여 언급함으로써 일말의 성취감을 안겨주기를 잊지 않는다.

크고 작은 문단의 결정 사안들에 대하여, 문학의 순수성과 세속적 다툼의 시말에 대하여, 그리고 문학성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사람살이의 건전성과 정다움이 함께 어깨를 겯고 가는 일에 대하여, 남운 시인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사람은 다치지 않으면서, 문학은 문학답게 하는데 기여해 왔음을 필자는 여러 번 경험했다.

이 작품을 접하면서 그런 원동력이 바로 함께에 있음을 비로소 알겠다. 후배 문인을 챙기는 일이 곧 달빛도 으스스한 성황당길 마중 나가는일이요, 실의에 빠진 문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곧 풀도 얼키설키 약 차올라 짱짱해지는일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다툼에는 햇살도 공작처럼 꽁지 펴주는일이요, 문학성이 훼손되고 정겨움이 다치는 경우에는 진드기처럼 징그럽게 붙어먹고 산다고 핀잔 들어야 할정도로 함께 풀어가는 일이다.

하느님의 형상이 사람이라고 했다. 시인은 지상에 살면서 하느님[]을 닮으려는 자들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사람됨으로 그대의 사람됨을 부르는 이름은 바로 사랑이다. 푸름은 우리가 함께 하느님의 신민이 될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다. 사람다움의 생명력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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