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슬픔마저 행복으로 읽는 감수성 훈련이다.”
“시는 슬픔마저 행복으로 읽는 감수성 훈련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12.13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이 시끌벅적하다

가을이 진군하는 소란이었다

 

또 한 분, 소란을 쓸어내시는 분

노치원 9학년2

 

아들 내외는 여직 여름 꿈이 깊은데

 

벌써 삼십 여년을 소란이시다

소란을 피우게 하는

저놈, 저 가을놈을 어찌할꼬?

 

-송희복(1966~ 전북 부안)석류나무전문

  왜 시를 읽고 시를 쓰는가?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많기도 하지만, 또한 궁색하기도 하다. 많다는 뜻은 시인들이 내놓은 시 작품 하나가 바로 시를 읽고 쓰는 이유이기도 하며, 궁색하다는 뜻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아도 시를 쓰는 이유를 쉽게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의 존재 이유와 그 가치에 대한 말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고, 손바닥과 손등 같은 격이다. 시를 쓰는 이유는 시를 읽는 이유가 되고, 시를 읽는 까닭은 시를 쓰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동전의 앞뒷면을 나눌 수 없고, 손바닥과 손등 역시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시는 스스로 질문이자 해답이기도 한 특징을 지닌 문학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이유와 시를 쓰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이끄는 원동력이다.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착한 일이나 악한 일이 모두 자기 수양의 거울이 된다는 말이다. “남의 착한 행실을 보거든 나도 착한 행실을 했는지 찾아보고, 남의 악한 행실을 보거든 나도 악한 행실을 저질렀는지 경계하라.”(性理書) 즉 선행과 악행이 모두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잘 알고 익혀서 선행을 하고, 이런 이치를 잘 모르고 잊어서 악행을 하는 것이겠는가? 머리로는, 생각으로는, 이치로는 선행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면서도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 이유가 바로 감정의 노예가 되기 쉬운 인간의 약점 때문이다.

  칠정七情이라고 하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은 앞에서 말한 머리(생각이치)와는 그 출처가 다른, 감정의 산물이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 작용이다. 이성과 감성은 사람됨을 특징짓는 두 갈래지만, 이성의 산물은 한 번 입력[인지]되면 비교적 오래 유지하는 특성이 있지만, 감성의 산물은 한 번 입력[체험]해도 금방 날아가 버리고 마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이성의 판단을 요구하는 삼강오륜이나 구구셈 외우기는 한 번 익히면 쉽게 잊히지 않는 반면, 기쁘거나 화를 냈던 일, 슬프거나 즐거웠던 일, 사랑하거나 싫어했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쉽게 휘발되고 만다. 문학은 바로 그런 감성을 다루는 예술이다. 그 중에서도 시, 서정시는 특히나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감정]을 본격적으로 그려내는 언어예술이다.

  이 시에서도 그런 감성적 측면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가을이 왔다거나, 연로하신 어머님께 효도를 해야 한다거나, 젊은이는 항상 피곤하다거나 하는, 이성적 판단[인식]을 다루지 않는다. 가을이 어떤 느낌으로 왔는지, 아흔두 살 어머니께서 낙엽을 쓸어내시는 소리를 시적 화자[아들]은 어떤 느낌으로 듣는지, 해마다 가을이면 낙엽을 떨어뜨려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늦잠을 훼방하는 저 놈[석류나무]가 어떻게 미운지, 시적 화자[아들]은 그 느낌을 시심이라는 붓을 들고, 시어라는 물감으로 풀어, 한 폭의 가을 수채화를 그려낸다.

  이쯤에서 보면 앞에서 언급했던 시를 쓰는 이유와 시를 읽는 이유가 저절로 밝혀진 셈이다. ‘가을이 왔다는 정보를 얻기 위해, ‘92세에 이르신 노모께 효도해야 한다는 도리를 공부하기 위해, ‘생업에 충실한 젊은이는 항상 피곤에 절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쓰고 읽지는 않는다. 이런 확인은 바로 이성적 행위다. 이런 도리를 익히기 위해 이 시를 쓰고 읽는다면 그것은 마치 삼강오륜을 암기하고 구구셈을 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1[起句]에서는 올해도 가을이 되니 석류나무는 변함없이 낙엽을 떨어뜨리는구나! ~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구나! [어머니께서도 또 한 살 연치가 늘어나시는구나!] 2[承句]에서는 그 가을을 어김없이 쓸어내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 올해 아흔두 살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건강하시니 참 내 홍복이로구나!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그 낙엽을 쓸어내는 어머니의 비질하시는 소리가 시적 화자[아들]의 늦잠을 깨운다[3-轉句]고 했다. 그리고 4[結句]. 벌써 삼십여 년을 어김없이 가을이면 낙엽을 떨어뜨리는 석류나무, 여전히 그 낙엽을 쓸어내시는 우리 어머니, 저 소란이 그저 밉기만 하다. 어머니는 낙엽을 쓸어내시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연치를 지워내시는 중이다. 반어와 역설이 왜 시문학이 즐겨 차용하는 전가의 보도인지 알겠다.

  시는, 시적 정서는 말하지 않고 이렇게 그려서[image] 보여줄 뿐이다. 시적 정서[느낌]을 연마하여 슬픔마저 행복으로 색칠할 것인가, 아니면 이치와 도리를 암기하며 자신을 채찍질 할 것인가, 오로지 시를 읽는 독자의 몫일 따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