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으로 건져 올린 월척 한 수, 낙조”
“시심으로 건져 올린 월척 한 수, 낙조”
  • 전주일보
  • 승인 2021.12.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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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당 자갈길 흙먼지 날리며

변산나무 비탈길 오르내리던 곳

바닷새 곤한 날갯짓 접어 쉬어 가는 곳

 

이백리 마실 길 해변 따라서

해당화 붉은 미소 살갑게 맞는 곳

갈매기 쉰 목소리에 귀마저 잠기는 곳

 

웅연조대 앞바다 갯내음 물씬 나고

대어를 꿈꾸며 시심 낚시 드리우니

서해에 잠기던 낙조 월척을 건지다

 

-김영렬(1956~ 전북 부안)작당포구에서전문

  강원도에 있는 정동진은 일출의 장관을 보는 명소로,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정 동쪽에 위치했다는 지역적 특징 때문에 유명세가 더해져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특히 명절, 연말연시를 맞으면 정동진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필자도 그런 명성을 찾아 정동진에 일출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운 좋게도 날씨가 쾌청하여 일출의 장엄한 광경을 넋을 잃고 감상한 적이 있다. 유명세가 붙을 만하다는 느낌과 함께.

  해돋이[일출]이 있다면 반드시 해넘이[일몰]이 있을 것이고, 해돋이를 감상하기에 좋은 명소가 있다면, 반드시 해넘이를 감상하기에 좋은 명소도 있을 법하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고, 만물의 됨됨이가 그렇다. 정동진의 해돋이만큼 유명세를 타지 않았지만, 여행 마니아들이나, 풍광 사진을 담아내는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해넘이 명소가 있다.

  해넘이의 장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명소로 전라북도 부안군 작당 포구를 추천한다. 아니 필자가 추천하기 이전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해넘이 명소가 바로 작당 포구다. 여기는 변산반도의 아주 작은 포구지만, 일몰의 장관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낙조가 비치는 작당 포구의 갯벌은 그냥 갯벌이 아니다, ‘황금 갯벌이다. 석양이 비치는 작당 포구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면, 저녁노을이 왜 아름다운지, 인생 노을이 곱게 물든 노년의 삶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부안 토박이 시인의 작품을 접하면서 작당 포구 앞에 펼쳐진 황금 갯벌이 눈앞에 환히 떠오른다. 이 작품은 세 수의 평시조로 된 연시조다. 시조의 안정적인 정형률에 얹혀, 작당 포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을 매우 유려하게 노래하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는 까치당이며 작당 포구의 지형적 특성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가 오르내리던 삶의 터전을 그린다. ‘변산 나무라고 했다. 변산반도에는 변산에 집중 서식처를 이루어 보호하는 나무들이 있다. 호랑가시나무며, 꽝꽝나무며, 비선나무 등이 변산을 근거지로 군락을 이루어 집단 자생하고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 밖에도 변산반도는 생물 다양성의 측면에서 다종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자연환경이 좋아야 사람도 살기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 생거부안生居扶安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어찌 바닷새만 날개를 접고 쉬겠는가? 서정적 자아는 바닷새를 객관적 상관물로 하여, 고단한 현대인들의 휴식처요 힐링 명소로 변산반도를 그린 셈이다.

  둘째 수에서는 부안-변산마실길을 소개한다. 기초자치단체에서는 탐방로를 경쟁적으로 개설하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을 필두로 탐방로 한두 곳 없는 기초자치단체가 없을 정도다. 섬이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수많은 탐방객을 불러들이는 제주도의 제주올레길을 예외로 한다면, 부안 변산마실길처럼 좋은 환경을 두루 갖춘 곳도 찾기 어렵다. 변산마실길은 2백여 리로 이어진다. 1코스부터 제13코스를 걷노라면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풍광의 연속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해안과 내륙이 조화를 이루며, 내변산이 안고 있는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호수가 만들어내는 절경이 있는가 하면, 높고 낮은 산줄기들이 곳곳에 품고 있는 절승은 이루 헤아리기 벅차다.

  그래서 해안에서는 갈매기들의 쉰 목소리에 귀마저 잠길 정도라면, 산에 들어서면 또한 산새들의 노랫소리에 마음마저 잠기지 않고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변산마실길을 걸으면서 자연을 그냥 자연으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세속적 삶의 헛된 소리에 귀를 잠그고, 마음 문을 잠그는 촉매로 삼았을 것이다. 살면서 밖을 향해 [마음의]문을 열었을 때 들어차는 것이 번뇌라면, 밖으로 난 [마음의]문을 잠갔을 때 비로소 [마음의]평화는 깃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失者無而前失煩惱(실자무이전실번뇌: 잃는 것 없이 모두 잃는 게 번뇌요.)/ 得者無而全得智慧(득자무이전득지혜: 얻는 것 없이 모두 얻는 게 지혜다.)라는 부처의 말씀이 진리임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시적 자아는.

  셋째 수에서는 비로소 이 작품의 서정적 자아의 궁극적 지향점을 결구한다. 변산반도를 품고 걸으면서 시적 자아는 월척을 꿈꾼다. 그 낚시터가 바로 변산 팔경 중 제1경에 해당하는 웅연조대熊淵釣臺. 곰소 앞바다에 곰처럼 생긴 두 개의 섬 앞의 깊은 소를 웅연이라 한다. 세상의 낚시꾼들은 이곳에서 월척을 꿈꾸었겠지만, 시적 자아는 그저 황금 갯벌을 물들이는 낙조를 월척 삼아 이처럼 웅숭깊은 시조 한 편을 낚아 올린 셈이다. 변산의 강태공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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