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수행자의 길은 하나다”
“시인과 수행자의 길은 하나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11.2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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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봉 연무 보며 아침을 열고

낙조대 노을 따라

하루를 내려놓는다.

장삼이사 길을 찾아 암자에 오르지만

배낭 위 근심 더해 힘겹게 내려가며

너에게도 불성이 잇느냐

희롱하듯 묻는다.

해 가린 눈썹 사이로

그들을 본다.

네 발로 걸을 때로 돌아간다면

월명암 부설거사,

너의 이야기일 터인데

 

-김영훈(1959~ 전북 정읍)월명암 삽살개전문

 

  문학은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삶에 대하여 질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시인 작가는 현인이나 성자처럼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대하여 회의하고 의문하기를 선호한다.

  그런 회의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스스로 궁금증이 풀리고, 일말의 속 시원하고 즐겁게 해답을 찾았다고 느끼게 하는 길이 바로 문학이다. G 스타인(Gertrude Stein.1874~1946.미국)은 문학, 특히 시문학이 지닌 이런 역할을 매우 명쾌하게해답이란 시로 남겼다.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생의 해답이 궁금하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질문을 쏟아내지만 뾰족한 해답은 듣기 어려운 것이 인생살이다. 그런 중에도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장르가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종교와 문학은 그런 영역의 대표가 될 만하다.

 

  이 시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생의 해답이 궁금한 시적 자아가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서너 가지 길을 통해 전개되어 있다.

 

  첫째는 조주무자趙州無字선문답이다.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없다[狗子無佛性]’라고 한 것에 대해,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가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를 의심한다. 이 의문을 타파하게 되면 견성見性한다는 설화다.

  마침 시적 화자가 찾아간 월명암에 삽살개가 방문객들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이때 문득 조주무자 설화를 떠올리며, 시적 자아의 본성에 대한 의문이 일었을 것이다. 이 화두의 참뜻은 과연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없을까 끊임없이 사유하라는 것,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 해답을 터득하라는 것이다. 인생살이가 그러하듯이.

 

  둘째는 신라 신문왕12(692)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월명암에는 부설거사설화가 전해진다. <계행과 경학에 뛰어난 부설거사는 만행 중 김제 성덕면 무구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는데, 불심이 지극했던 무구원의 벙어리 딸 묘화가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트인다.

  이에 묘화는 부설에게 자신을 거두어주기를 원했으나, 수행자의 몸이라며 거절한다. 묘화는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하다가 아비 무구원에게 발각된다. 딸의 자진 의도를 목격한 무구원은 부설거사에게 묘화를 거두어주기를 간절히 청한다. 이에 부설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묘화와의 인연을 받아들인다. 그 후 부인 묘화, 아들 등운, 딸 월명 등 온 가족이 해탈을 이루었으며, 부설거사는 용맹정진하여 110세까지 장수를 누리다 고요히 입적하였다.>-(‘전통사찰종합정보에서 발췌)

  이 작품에서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시적 화자는 알 길이 없으나, 개는 물론이요, 모든 중생이 묘화처럼 간절함으로 정진한다면, 불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발심을 결구로 삼는다.

 

  셋째는 월명암의 자연경관이 전해주는 아름다움이다. 월명암은 변산반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도량이다. 부안은 예로부터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해서,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 살기 좋은 곳은 수행하기도 좋은 곳일 터,

  월명암에서 내변산과 외변산[서해]를 둘러보노라면 부안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빼어난 경관이 주는 아름다움을 시적 화자는 의상봉 연무 보며 아침을 열고/ 낙조대 노을 따라/ 하루를 내려놓는다.”고 했다. 하루를 시작하고 그 하루를 마감하기에 가장 평안을 주는 곳, 그곳이 바로 부안 변산반도가 펼쳐내는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그래서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세가 험악하고 풍토가 척박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적응하기 위해 강인한 성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부안 변산반도가 안고 있는 풍광처럼 산세가 수려하고 생물이 풍부하여 사람살기 좋은 풍토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유연하고 섬세한 성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안 토박이 시인 묵객도 적지 않지만, 예로부터 내로라하는 예인들이 부안을 즐겨찾기도 하였다.

 

  이 시의 화자처럼 무거운 등산배낭을 짊어지고 장삼이사 길을 찾아 암자에 오르기도 하고, ‘배낭 위 근심 더해 힘겹게내려가면서도 동심으로 돌아가는 길이 곧 시인의 길임을 깨닫기도 한다. 바르게 아름답게 정의롭게 사는 것이 시인과 수행자의 길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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