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이
이발이
  • 전주일보
  • 승인 2021.11.1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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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장군의 긴 칼날처럼 날렵하게 자라던 마늘잎에 누런 물이 들었다. 수확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이다. 마늘을 캐러 갔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삽으로 캤다. 온전한 모습으로 나오는 녀석이 드물다. 이곳저곳에 상처투성이다. 난감한 마음에 한창 망설이고 있는데 지나가던 이웃이 마늘 캐는 농기구가 따로 있다 귀띔한다. 농사를 만만하게 보고 달려든 내가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이 말해준 것은 이발이라는 농기구이다. 처음엔 쇠스랑 같은 삼발이였는데 농사일을 하면서 맞춤형 농기구로 고안해 내다보니 발하나를 없앤 이발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날카로운 발이 두 개가 뻗어 있어 보기에는 조금 섬뜩한 물건이다.

이발이를 사러 갔다. 아내가 마늘 캐는 일을 처음 해보는 기념으로 하나를 더 사기로 했다. 이발이를 처음 본 아내는 기겁했다. 뾰족한 발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소름까지 끼치더라고 했다. 아내는 이발이라는 농기구가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들었다 한다. 호미를 들고 감자도 캐고 화초를 심어본 일은 있으나 이발이로 마늘 캐는 일은 난생처음이라 했다.

거기에 하나 더 놀란 일은 가격이 생각보다 매우 싸다는 점이다. 하나에는 삼천 원인데 둘을 사면 오천에 주겠다는 것이다. 시골 장의 후한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이발이 하나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까? 펄펄 끓은 쇳물을 조형 틀에 부어 넣어서 끝부분은 망치로 두드려서 뾰족하게 만들고, 손잡이 막대를 끼워 넣을 곳은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 숙련된 기능공이 만든다 해도 제법 시간이 걸릴 텐데 단돈 삼천 원이라니 깜짝 놀랄 일이다.

농사에는 그 기능을 제각각 발휘하는 농기구들이 있다. 이발이는 땅속에 들어 있는 씨알이나 뿌리를 캐내는 데 제격이다. 마늘도 캐고 도라지도 캘 때 쓰인다. 땅콩이나 인삼을 캘 때도 찾게 된다. 파 엎고 부수는 데는 괭이나 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정교하게 캐내는 데는 이만한 연장이 없다. 특화된 작물에 특화된 농기구라고나 할까? .

우리 집 농막에도 옛 농기구들이 세월 속에 갇혀있다. 호미와 삽과 괭이 등 잡다한 농기구들이 헐 대로 헌 모습으로 제각각 나뒹굴고 있다. 그 곁에는 이발이는 보이지 않고 대신 삼발이가 있었다. 삼발이는 씨알이 굵은 큰 고구마나 감자 등을 캐내는 데 쓰이는 기구이다. 또는 잡초가 무성한 묵정밭을 파 엎는데도 한몫한다.

어느 농기구고 가릴 것 없이 닳고 닳아 뼈대만 앙상하다. 거기다가 덕지덕지 녹까지 슬어 볼품이 없다. 마치 요양원에서 앙상한 모습으로 먼 나라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았다. 하기야 그 농기구들은 어머니의 삶과 함께해 온 피붙이 같은 것들이다. 그 농기구들의 허름한 모습 속에 어머니의 고단한 평생이 스며있다. 닳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단한 세파를 견디어 냈다는 증표이다. 닳는 것은 이 농기구만이 아니다. 어머니 또한 세월 앞에 닳고 닳아 생의 끝자락에 와 있다.

새로 산 이발이를 마늘 앞에 세우고 땅으로 박았다. 힘을 조금 주어 뒤로 젖히니 굵은 마늘이 쏙쏙 솟아 올라온다. 한 손으로 마늘 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살살 흙을 털면 튼실한 알이 듬직하다. 어느 것 하나 농기구에 다치지 않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다. 이발이가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 결과이다. 거두는 기쁨이 절로 솟아난다.

농사에 쉬운 일이 있다던가? 손바닥만 한 땅이지만 한바탕 캐고 나니 땀이 송송 솟는다. 아내의 볼도 불그스레 사과 물이 들었다. 이발이의 존재조차 모른다던 아내이고 보니 마늘 캐는 작업이 쉬울까 싶지 않았다. 난 그녀에게 이왕에 이발 이를 장만했으니 내년에도 마늘 농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이젠 아예 농부로 입문해야겠네.”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는 그녀지만 결코 싫은 내색은 아니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알맞은 재료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옷을 꿰맬 때는 바늘이 있어야 하고 풀을 벨 때는 낫이 있어야 하듯 마늘을 캘 때는 이발이가 제격이라는 걸 오늘에야 터득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라 했다.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나이만 먹어 자꾸만 구석으로 몰리는 나도 이발이처럼 어디 한 군데 쓸모가 있으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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