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선물이다!”
“가을은 선물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11.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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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소리가 하늘을 가르는 날

구름은 서 말 닷 되

바람은 아 홉 포대기와 함께

호박고구마가 왔다

 

고구마 밭이 붉었시유

온 밭이 울퉁불퉁 홍단이어유

 

딸네사돈은 꽃방석에 앉히고

며느리사돈은 가시방석에 앉힌다는데

 

사위자랑 담뿍 담아 보내주신 사돈께

며느리 어여쁨 수놓은

시아비 꽃방석이나 보내드려야겠다.

 

-박순(1952~ 전북 정읍)꽃방석전문

 

 

참 보람 있는 계절이다. 참 소중한 선물이다. 참 바람직한 사돈 관계다. 참 아름다운 마음결이다. 참 좋은 시다. 대뜸 참을 앞세우며 다섯 번, 다섯 가지나 덕담을 해댄다. 무슨 일일까?

시詩가 이렇게 우리의 삶을 전방위에 걸쳐 특별하게 채색할 수 있음에 감동할 따름이다. 시詩가 아니고서 어떻게 이 다중적인 뜻을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은 오직 시詩에만 허락된 혜택인가 싶다.

이 시는 사돈지간에 주고받은 선물에 관한 시다. 선물이라고 하면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무슨 뇌물성 선물이 아닌가, 김영란법인가 뭐시긴가 하며 색안경을 끼고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고약한 선물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관계를 관계답게 살려내는 선물이다. 도대체 어떤 선물이 이토록 우리네 마음 안에 따뜻한 보일러를 틀어대는 것일까?

첫 번째는 가을 선물이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보람 있는 계절이다. 인간이 아무리 기술혁명을 왜장치며 잘난 체해봐야 자연의 순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봄이면 누구나 몸이 근질거리며 뭔가 생동하는 기운에 들썩인다면, 여름 또한 질풍노도의 폭풍우 한 번쯤 견뎌낼 각오를 다짐하기도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맞이하는 가을이야말로 안팎으로 자아가 성숙 되었음을 실감하면서, 낙엽의 뒤안길을 밟아 겨울의 초입까지 무난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계절이다. 가을은 바로 그런 절후다. 이들 사돈지간은 그런 가을을 주고받는다.

두 번째 선물은 가을 수확물이다. 호박고구마가 선물로 왔다. 그런데 이 호박고구마가 조금 수상하다. 구름 서 말 닷 되와 바람 아홉 포대기와 함께 왔단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선물이다. 호박고구마 한 자루를 보낸 사돈도 그렇지만, 그걸 구름과 바람으로 받은 사돈도 만만치 않다. 하긴 호박고구마에서 단물만 솎아 먹는다면 도리가 아니다.

호박고구마를 호박고구마가 되게 했던, 사돈이 흘렸던 땀과 자연이 보탰던 성심을 읽지 않고 어떻게 호박고구마의 단맛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호박고구마는 자연다움과 사람다움을 보내고 또 받을 줄 아는 사돈지간의 마음인 셈이다.

세 번째 선물은 바람직한 사돈 관계의 선물이다. 딸네 사돈은 꽃방석에 앉히고, 며느리 사돈은 가시방석에 앉힌다고 한다. 이 속언을 듣자 하니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자니 이런 속언도 불쑥 나선다. 사돈집과 측간은 멀수록 좋다. 모두가 우리네 삶의 풍경을 엿보게 하는 말들이다.

출가한 딸이 된통 시집살이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친정 부모의 노심초사가 딸네 사돈을 꽃방석에 앉혀 후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며느리 사돈을 박대하는 심보는 또 무엇인가? 봄볕은 가을볕보다 따갑다. 누구는 봄볕은 사람의 기운을 앗아가지만 가을볕은 보약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딸과 며느리를 그렇게 차별했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망발 같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사람됨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자니 사돈집과 측간을 동격으로 보았던 망측한 심사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 사돈지간은 속언을 거꾸로 실천한다. 사위자랑 듬뿍 담은 꽃방석을 며느리 사돈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천년의 속담이 뒤집어지는 아름다운 선물이 아닌가.

네 번째 선물은 고운 마음결이다. 이런 선물을 주고받자면 호박고구마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꽃방석만으로도 성사되지 않는다. 호박고구마 안에 땀과 눈물을 담아둘 줄 알아야 하며, 꽃방석에는 딸 못지않게 시부모님을 섬기는 며느리의 효심이 수놓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돈지간에 주고받은 선물엔 가족들의 마음결이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다섯 번째 선물이 바로 좋은 시다. 시를 하기 쉬운 말로 언어 예술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본대로 이 시를 담아낸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기교가 탁월하다고 해서 이처럼 좋은 시를 만날 수는 없었으리라.

이 시가 탄생하기까지는 바람과 구름의 조력, 사위와 며느리의 살가운 효성, 그리고 사람다운 길을 찾아서 나누고 건네주려는 사돈지간의 성심이 없고서는 시는 그렇게 호락호락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다. 시인에게나 시를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주문을 건다. 좋은 시를 만나려 하지 말고, 좋은 삶을 쓰려하라. 그러면 좋은 시는 이처럼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나저나 딸이 없는 필자는 꾸려 보낼 가시방석이 없어 난감하다. 나도 하나뿐인 며느리 사돈께 꽃방석이나 선물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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