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 전주일보
  • 승인 2021.09.0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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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중략-~눈물로 쓴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패티 김이 부르는 가을 노래가 가슴을 저미듯 슬픔과 그리움으로 데려간다. 이런 날이면 소름이 돋듯 엄습하는 외로움에 머릿속이 텅 빈 채 흐르는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가을이다. 선선해졌지만 하루가 멀게 비가 내린다. 가을장마란다. 벌써 벚나무 잎들이 노랗고 붉은 색으로 변하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쓰르라미 소리도 어느새 잦아들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여기저기서 눈에 뜨인다. 내게는 너무 가혹한 계절 가을이 다시 찾아왔다. 누구에게는 결실의 계절이고 선선하고 맑아서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이언만, 내게는 상실의 계절이고 그리움과 슬픔이 잇따라 몰려드는 아픈 계절일 뿐이다.

어릴 적부터 가을이 오는 게 싫었다. 가을이 오면 전주천 내 수영장에 아무도 찾지 않아 서러웠다. 적막한 물가에서 피라미 낚시로 마음을 달랬지만, 아이들이 한껏 고함치며 물속으로 텀벙텀벙 뛰어들던 그 소란한 냇물이 그리웠다. 그 시끄러운 아이들의 소리에는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물속 드잡이질에 신명을 내던 깨복쟁이 친구들이 있었다. 저만치 아래쪽에는 고추를 달랑거리며 뛰노는 사내아이들을 피해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위쪽을 흘끔거리는 여자아이들도 보였다.

그 아련한 시절을 건너 고등학생이던 어느 가을에 친구 집에서 내 가슴을 사정없이 흔든 여학생을 만났다. 깊고 그윽한 눈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첫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늘씬한 몸매도 아니었지만, 그 눈빛 하나로 나를 단번에 포로로 잡아버린 친구 여동생의 친구였다.

짓궂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하던 나였는데 그저 가슴이 쿵쿵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아침마다 등굣길에 그 학생을 보기 위해 늦게 집에서 나서다 보면 학교가 먼 나는 흔히 지각해서 벌을 서는 일도 있었지만, 그녀를 못 보면 학교 수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날엔 그녀의 하교 시간에 맞추어 남은 수업을 빼먹고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얼굴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보기만 하면 좋은 짝사랑이었다. 그러던 이듬해 5월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우리 집은 큰형을 살리느라 알거지 꼴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어려워진 집안 형편을 도와 아버지와 함께 집안일을 거들며 그녀에게서 스스로 멀어졌다. 내 처지에서 그녀에게 다가설 용기마저 잃었기 때문이다. 가을에 만난 사랑은 그렇게 다음 가을에 접어야 했다.

그 뒤부터 가을이면 더욱 그녀가 그리웠지만, 먼발치로도 그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그녀를 찾을 수 있었을 터이지만 찾지 않았다. 모르는 채 그저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견뎠다. 나 혼자 적어두었던 편지와 시()가 쌓여 제법 많은 분량이 되었던 어느 가을에 몰래 간직했던 그녀의 사진 한 장과 함께 교동 남천교 아래에서 모두 불살라 태웠다.

60, 한 갑자(甲子) 세월이 흐른 오늘도 가을이 오면 그날의 아프고 먹먹한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날 만큼 속으로만 삭였던 사랑은 절절했었다. 교직에서 물러나 노인이 되어있을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여 찾아볼까 했지만, 찾지 않았다. 다 변해도 그 눈매는 남아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터 이어도 보는 순간, 내 오랜 추억과 그리움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을이 내게 들어앉아 있다. 삶의 절정기에 불치병에 걸려 나를 16년 동안 간병인으로 살게 했던 아내가 떠난 때도 가을이었다. 6년 전 문우들과 문학기행을 떠났던 10월 스무날, 아내는 가뭇없이 갔다. 16년이라는 시간을 지워버린 그녀는 지는 낙엽을 따라 내 곁을 떠났다. 그 뒤에 나를 전주천 물개로 만들어주었고 내 깐족거림에 늘 주먹을 휘두르며 싸웠던 작은형이 어느 날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도 10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내게 가을은 아프고 쓸쓸한 계절이다. 나무가 잎을 떨구듯, 가을은 내게서 차근차근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낙엽이 구르는 오솔길의 낭만도 무르익는 결실도 내게는 그저 아픔일 뿐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내 육신이 이 별을 떠나는 때도 가을이려니 한다.

내게 아픈 가을만 남기고 간 이들이 오늘따라 사무치도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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