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평온한 마음”
“시심詩心,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평온한 마음”
  • 전주일보
  • 승인 2021.08.0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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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詩心,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평온한 마음

오늘 적요는

숨어있는 소리가 넘치는 빈들이다

뇌의 손이 합장할 때 있다

 

무 밑동이 순백의 옷을 껴입는 소리에

구름은 스스로 우아함에 취한다

 

두 발을 모으고 뒤꿈치를 높이 들어

가장 조금 땅에 의지하는 몸짓에

바람은 명주 보자기를 편다

 

콩꼬투리 튀는 소리에

적요의 가족이 모여든다.

-송명숙(1949~2019 전북 진안)「적요의 바깥」전문

시는 일단 시를 쓰려는 마음[詩心]이 일어나는 게 먼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시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체험이 우선이다. 체험은 다양하게 온다.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대화를 나누다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다가, 그도 아니면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멍때리다가 불현듯 오는 것이 체험적 정서다.

이 정서가 보다 집중적인 정신 활동의 과정을 거치고 미학적 표현을 궁리하며 고급한 정서로 승화되는데, 이를 일러 정조[情操-인간의 정신 활동에 따라서 일어나는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감정]라고 한다. 그러니까 체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정서가 시적 정서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고차원의 정신 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정서를 막연하게 언어로 옮겨 놓으면 시가 된다고 보는 섣부른 생각을 시 창작에 입문하는 초보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체험적 정서를 깊이 사유하면서 이를 구체적인 미학으로 승화시키려는 정신 활동이 미치지 못할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 작품을 예로 보기로 한다. “오늘 적요는/ 숨어있는 소리가 넘치는 빈들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려내고 싶은 적요는 어떤 상태일까? 적요寂寥라는 말은 함축하는 의미가 매우 많은 추상명사다. 그것도 한자어에서 비롯하여 그 뜻을 한 마디로 실감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시적 화자는 아마도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숨어있는 소리가 많은 빈 들이라고 했다. 아마도 시적 화자는 가을 들판에 일하러 나갔거나, 아니면 빈들을 거닐면서 적요를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적 화자가 느낀 적요는 고요하고 평온하다는 본뜻을 지녔다. 빈 들에서 시적 자아는 적요를 실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언어로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붓질보다, 음악가의 작곡보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화가는 물감이라도 있지만, 작곡가는 음표라도 있지만, 시인[시적자아]에게는 언어라고 하는 무형의 뜻을 지닌 기호만 지녔을 뿐이다. 그래서 숨어있는 소리가 넘치는 빈들을 그렸다. 소리[혹은 소음]들이 [보이지 않고]숨어 있다면 고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반어적 표현으로 적요라는 막연한 느낌을 그려내느라 고심했을 흔적이 바로 뇌의 손이 합장할 때 있다에 드러난다. ‘이나 합장이나 모두가 구체성의 사물 이름이거나 행위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는 뇌의 손이 합장했다는 표현을 통해서 사유하는 자아의 경건한 마음가짐을 그려낸 것이다. 듣고 보니 비로소 적요-고요하고 평안하다는 구체적인 느낌을 공유하겠다. 체험적 정서가 사유의 과정을 거쳐 시적 정조로 승화된 대목이다. 그것도 미학적 표현으로 다듬어서 생각의 깊이를 함축해 낸 것이다.

이때 비로소 시의 독자들은 적요의 구체적 느낌을 공유하면서, 시적 자아의 적요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2연과 3연에 적요를 그려내는 방법은 1연과 대동소이하다. 한 편의 시에는 내적 통일성과 필연성을 구비해야 작품의 완성도에 값할 수 있다. “무의 밑동이 순백의 옷을 껴입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바람은 명주 보자기를 펴는 소리를 듣고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보통 사람은 아니고, 시인만이, 시심으로 보는 사람만이 무의 밑동이 하얀 옷을 입는 소리, 바람이 명주 보자기를 푸는 소리와 짓을 눈여겨볼 수 있 있을 것이다. 바로 적요의 상태이고 모습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빈들의 상태이고 소리 아닌 소리다.

적요에는 고요함과 평온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쓸쓸하다텅 비다하늘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 말이다. “콩 튀는 소리에/ 적요의 가족이 모여든다고 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소리다. 아니 만물이 결실을 위해 고요하고 평온한 가을들녘이 무르익는 소리 아닌 소리다. ‘쓸쓸하고 평온하지만 텅 빈 하늘같은 계절, 바로 가을이 아니겠는가! 그 가을의 이미지를 적요로 설정하고, 그 적요의 가족이 모여든다니, 아무리 계절감에 둔감한 사람[독자]라 할지라도 가을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안겨 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심은 가을 빈 들녘처럼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평온한 상태를 본질로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거나, 그 됨됨이를 그려낼[image] 수 없다. 그래서 그렇다. 가을이 익어가는 것이나, 사람이 익어가는 것이나 적요의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치열하게 익어가는 것이다. 쓸쓸함과 평온함 그 바깥에서 무르익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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