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사랑과 헌신의 길”
“어머니, 사랑과 헌신의 길”
  • 전주일보
  • 승인 2021.07.2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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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랑과 헌신의 길

 

아이가 지하철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어머니는 손수건을 들고

입가에 소스가 묻을 때마다 닦아낸다

아이는 햄버거를 먹는 것이 세상일의 전부다

어머니는 침 한번 삼키는 일 없이

마냥 성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얼굴이다

 

어머니는 성스러운 것에 이끌려

무화과같이 말라간다

모든 성스러운 것은 착취자들이다.

 

-장철문(1966~ 전북 장수)어머니에게 가는 길전문

결구 모든 성스러운 것은 착취자들이다.”가 영~ 마음에 걸린다. ‘성스러운 것의 상대는 무엇일까? 얼른 생각하기에 속된 것이 떠오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성스러운 것의 상대는 낮은 것들일 거라는 생각이다. 낮은 것들은 성스러운 것을 추종하는 자들이며, 가진 것(물질이건 사랑이건)으로 성스러움을 취하려는 자들이며, 혹은 가난(물질이건 사랑이건)을 성스러움으로 면하려는 자들일 것이다.

보기만 해도 영험할 것 같은 사찰의 대웅전을 기웃거리노라면 그 우람하고 거대한 불상에 압도되곤 한다. 불교적 영성이 없거나, 지은 죄가 없다 할지라도 보통 사람은 그 황금빛 불상 앞에 가면 저절로 몸을 낮추지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가장 낮게 엎드린 몸의 자세를 보통 오체투지五體投地라 하여, 불가에서는 투지례投地禮를 가장 경건한 예로 친다.

몸의 다섯 군데머리, 두 무릎, 두 팔꿈치가 바닥[]에 닿아야 하니, 사람의 몸을 이보다 더 낮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몸을 낮게 하는가? 우러러보는 상대-존엄불상이 성스러운 것[거룩한 분]’이라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 성스러운 것의 상대는 속된 것이 아니라, 낮은 것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변두리 개척교회야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 웬만한 교회당에 가면 그 규모나 시설 면에서 우선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교회의 교인 수와 규모 면에서 세계의 토픽감이 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높은 강대상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치장한 유리 창문에 햇빛이라도 비칠 것 같으면, 마치 천상에서 하느님이 금방이라도 강림하실 것처럼 성스러운[거룩한] 분위기가 충만하다. 이럴 때 아무리 신앙심이 없는 범인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무릎을 꿇고 그 성스러움에 몸을 낮추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예배당에서는 이럴 때 쓰라고 무릎받침 의자까지 준비한 교회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성스러운 것[거룩한 분]‘의 상대적인 개념은 역시 낮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왜 모든 성스러운 것은 착취자들이다.”라고 단정하며 시를 맺었을까? 이를 밝히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따라가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저질러진 종교 범죄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렇대서 십자가[하느님]를 앞세우고 북남미대륙으로 쳐들어간 유럽인들이 식민지 쟁탈전으로 수백 년 동안 원주민들을 도륙하고 토산물을 착취한 제국주의적 만행을 떠올릴 것도 없다. 물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국지전 대부분은 그 성스러운 것[거룩한 분]’이 원인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니 문제는 성스러움을 가장한 인간의 탐욕이다. 인간의 우매함을 일깨워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착취자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황금빛 탐욕으로 가린 채, 인간에게 끊임없이 낮은 자세로 굴종만을 강요하는 우매한 종교 제도가 문제다. 당신의 몸은 물론 피 한 방울까지도 쏟아내며 사랑을 가르쳤건만, 사랑과는 정반대인 전쟁으로 사랑을 실현시키려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문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내가 믿는 신만 성스럽다는, 천당도 현금이 많아야 쉽게 입장할 수 있다는, 성스러운 것을 따르는 가장 큰 이유가 지위가 높아지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는 비뚤어진 신앙심이 문제다.

마찬가지로 엄마야 배가 고프건 말건, 굶주린 젖먹이가 어머니 젖무덤을 파고드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악귀가 따로 없다. 배고픈 유기체는 누구나 악귀가 된다는 것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바로 가장 속된 인간모순투성이고 비열하며 천박한 존재에게서 발견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이 시에는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음을 알겠다. 시의 화자는 시의 대상(지하철에서 햄버거를 먹는 아이와 이를 성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에게 가는 길에 나선 시의 화자-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자신을 일러, 자기 어머니를 무화과처럼 말라가게 한 착취자라는 자기 고백임을 알겠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종교와 신앙의 문제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착취자는 결국 성스러운 것[거룩한 분]’이 아니라, 나를 한없이 낮은 속물로 만드는, 눈먼 나의 신앙관이거나, 내리사랑에 빠져서 치사랑을 쉽게 잊는 유기체의 속물근성임을 어찌하랴! 자식 사랑을 부모공경보다 앞에 두는 게 자연의 이치라 할지라도,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서 어머니에게 가는 길을 찾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사랑과 헌신의 길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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