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지존의 고독을 감당할 자, 그대 이름은 시인!”
“절대지존의 고독을 감당할 자, 그대 이름은 시인!”
  • 전주일보
  • 승인 2021.06.1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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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지존의 고독을 감당할 자, 그대 이름은 시인!”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

너의 소중한 생각의 열매를 실현하라.

그리고 너의 고귀한 행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말라.

보상은 바로 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네 자신이 너의 최고의 심판관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너는 제 자신의 작품을 심판할 수 있다.

너는 네 작품에 만족하는가?

의욕 넘치는 예술가여!

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

 

-푸시킨(A. S. Pushkin-1799~1837. 러시아. 시인 소설가)

너의 자유로운 혼이전문

에드워드 윌슨이 쓴 <인간존재의 의미>라는 책을 보면 자유의지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종을 영속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설령 궁극적 자유의지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조작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자유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도 진화의 산물이듯이, 자유의지도 진화하는 의식과 함께 발전되어 왔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는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의식도 서서히 출현했다고 보는 견해다. 아주 높은 인간적인 단계는 스위치를 누르면 전등이 켜지는 것처럼, 갑자기 도달한 게 아니라. 300만 년에 걸친 선행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 용량이 600cc도 안 되던 수준에서, 호모하빌리스의 680cc를 거쳐, 호모사피엔스의 1,400cc로 뇌의 크기가 2배 이상 증가하고 진화하면서 인간의 의식도 자라났듯이, 인간의 자유의지도 그렇게 진화할 것으로 보는 낙관론의 근거다.

둘째는 의식과 자유의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두 번째 지점은 창발적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의식과 자유의지는 감각계와 뇌 양쪽의 다양한 부위들의 연관과 동조 활동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인간이 지닌 시공간의 지각범위가 아주 협소한 것도 하나의 강력한 추가 이점이다. 이런 협소한 감각들은 선행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의식을 진화시켜온 결과다. 감각정보와 시간의 경과를 이해하는 일은 대체로 의식 자체의 끝부분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는 인간의 작화作話-confabulation의 필요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마음은 이야기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인간의 의식적 정신생활은 전적으로 작화로 구축된다. 과거 경험한 이야기들과 미래를 위해 창안된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끊임없이 검토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이 물질적 토대를 지닌다면,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뇌의 다양한 활동 속에서 무언가가 시나리오를 짜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뇌의 기구로부터 독립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우리는 자아라고 부른다. 그 자아는 바로 지어낸 시나리오의 주인공들이다.

자유의지는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러므로 의식의 진화와 함께 자유의지도 진화할 때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할 것처럼 설령 자유의지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조작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종을 영속시키는 데, 자유의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푸시킨의 이 시는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가를, 시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의식적 마음에는 일상 현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뭐가 있든 간에, 그것을 밝히는 데는 과학자들보다는 철학자나 시인에게 맡기는 편이 더 낫다앞에서 인용한 윌슨이 지적한 말이다.

이런 지적을 푸시킨은 진작 알았던 것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푸시킨은 이 시로 대답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몰두하게 하는 게 이 작품이다.

인간이여, 자유의지를 실현하라!’ 푸시킨의 권고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다만 푸시킨은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자아]로 예술가[시인]를 설정한다.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가라가 그의 대답이다. 이것은 네가 창작[예술]하고 싶은 대로 예술[창작]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귀한 생각의 열매를 맺는 일은 고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타인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예술가 아닌 데서 찾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창작품[, 회화, 음악, 연극]심판[평가]’하고 보상[대가]’을 지불할 자는 바로 예술가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평판에 휘둘리고, 타인의 보상에 좌우되면서 어떻게 자유의지[창발성]를 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렇다. 예술 행위는 절대고독의 지존, 황제의 품격이 아니고서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고독한 길이다. 절대 권위를 훼손당할 수 없다는, 절대지존의 고독을 감당할 자, 그대 이름은 예술가-시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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