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인생이라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인생이라면…”
  • 전주일보
  • 승인 2021.06.0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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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인생이라면

하얗게 도배가 되네

벽에 바른 종이도 없는데

내 안의 돌멩이 첨벙

낯꽃 일어

소슬바람 첫 줄기 은빛 억새로 너풀거리니

 

찢기지도 않고 잘 붙네

풀 솔도 없는데

식지 않는 밥 한술 모락김

눈밭으로 번져

한 줌 허리 돋을 볕에 대장간에서 달궈지니

 

밑줄 친 빨간 글씨

혈액으로 돌돌 심장에 묻어두네

 

-이진재(1963~ 전북 장수 )칠판 닦기전문

한 번뿐인 삶이다. 두 번 살 수 있다면, 우리 인생 실패할 확률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고 없이 왔다가, 연습 없이 살다가. 기약 없이 가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확신에 찬 삶이나, 확실히 성공했다는 인생을 만나기 어렵다. 모두가 후회하고 자탄하면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며, 현생에서 미진하고 후회스러운 생을 내생에서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이 벼르곤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런 내생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긴 노벨문학상을 타면서 명성을 높인 쉼보르스카(1923~2012. 폴란드)같은 시인도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다. 두 번은 없다 지금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실습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 1,2) 명확하다, 선명하다, 단호하다. 인생을 관조하는 시안도, 그것을 사유해 내는 시심도 범상치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무엇을 더 사족을 붙일 것인가, 무엇을 더 내생에 미련을 둘 것인가? 낙제 없는 인생에서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한때 연필로 쓰세요란 대중가요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노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부를 수도 없었지만, 제목만은 유행을 탈만하다 느꼈다. 그런 기억을 되살려 찾아보니 실은 이 제목 앞에 사랑은~’이란 주제어가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가 제목이고, 이어지는 가사는 이랬다.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그러니 사랑을 쓰려면 연필로 쓰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종이에] 쓴다면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마저 쉽게 쓰고 쉽게 지울 수 있다니, 인생을 지탱해 내는 한 허리가 휘청하는 대목이긴 하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학교에는 배움이 있다. 이 배움을 통해서 그래도 낙제 없는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인생이란 학교의 배움터에는 종이 대신 칠판이 있다. 칠판은 분필[백묵]이 있어 쉽게 쓰고 또한 쉽게 지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진하게 써도, 인생을 논하는 강사가 아무리 뜨거운 열변을 쏟아내도, 지우개로 쓰윽~ 지우면 다시 칠판이 얼굴을 내밀곤 한다. 얼마든지 다시 쓰고, 얼마든지 다시 지우라며, 한 번뿐인 인생길을 다시 찾아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칠판은 말끔해진 얼굴을 드러낸다.

백묵은 그냥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이란 화자의 가슴에 첨벙~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그 여파의 끝에는 낯꽃 일어환한 미소로 번지게도 한다. 인생을 논하는 자는 말하면서 [칠판에] 쓰지만, 인생을 담아가는 자는 칠판을 지우면서 [가슴에] 쓴다. ‘낯꽃이라 했다. 칠판을 손으로 지우면서, 화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던 것이다.

이를 섣불리 깨달음의 미학이라느니, 혹은 앎의 희열이라느니, 또는 법열의 순간이라고 과대 포장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칠판을 닦는다는 것은 일종의 구도 행위와 다름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긴 든다. 왜냐하면 칠판 닦기는 일종의 몸의 부림이면서, 재확인의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으로 들어왔던 백묵의 언어를 몸으로 일일이 닦아내면서 재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다음 연에서도 이어진다. 백묵가로 휘날리는 모습을 눈밭으로 번져간다고 했다. 그런 행위들이 인생을 담금질[鍊鋼=벼림]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줌 허리 돋을 볕에 대장간에서 달궈지니라고 했다. 쇠는 대장간에서 담금질해야 강철로 변신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배움터에서 인생을 담금질한 자만이 강철로, 쓸모 있는 도구로 거듭날 수 있다. 그것을 칠판을 닦으며 확인하는 모습이다.

이런 화자의 결의는 결구에서 승화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배움은 인생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양식이다. 시적 자아는 칠판을 닦으면서 밑줄 친 빨간 글씨/ 혈액으로 돌돌 심장에 묻어두네했다. 두 번 없는 인생일지라도 고치고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배움에서 찾을 수 있다면, 굳이 내생까지 가서 새로운 인생을 찾을 수고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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