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부끄러운 그 날
5.16, 부끄러운 그 날
  • 전주일보
  • 승인 2021.05.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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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편집고문
김 규 원/편집고문

비가 내린다.

하늘도 이 나라에 악()의 씨앗이 발아하여 나라를 집어삼킨 그 날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는가 싶다. 나라를 지키라는 군인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건너와 정권을 탈취하고 그들의 세상을 만들었던 날이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후략)”, 그리고 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혁명 공약이라는 도둑질 약속을 내놓았지만, 18년간 그들은 이 나라를 유린했다.

학생과 시민이 피흘려 가까스로 찾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기회주의자 육군 소장 박정희가 군사독재를 시작한 날이다. 나라를 강탈한 군인들은 저항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잡아들여 죽이고 가두었고, 돈 가진 이들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모두 빼앗아 나눠 가졌다.

모든 사업은 군 출신들이 장악하게 해서 끼리끼리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열었다. 땅 투기를 시작한 것도 군인들이다. 강남땅을 거의 강제로 수용해서 군인들에게 나눠주어 불만을 잠재우고 그들은 저절로 부자가 되었다.

계엄령 아래서 군인이 면장까지 차지하여 군대식 행정을 제도화하고 권력 맛을 들인 군인들이 전역하여 지역의 권력을 장악하는 자리를 차지했다. 군대식 부정이 사회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어 부정이 일반화되었다.

새마을 사업을 빙자하여 국민을 하나의 라인에 묶어 흔들 수 있게 했고 그러고도 불안하여 곳곳에 공산당식 프락치를 심어 서로 감시하게 했다. 술자리에서 불만 한 마디만 나와도 금세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끌려갔고 잡혀간 이들은 군사 법정에서 가혹한 형을 받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죽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희생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간첩이라고 몰렸다.

 

일본 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박정희는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 보내고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군관학교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우울하고 남과 말도 잘 하지 않는 생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인 토벌을 나가는 명령이 떨어지면 요시를 외치며 신바람이 나서 앞장서 나갔다고 한다.

해방되자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남로당이 수세에 몰리자 남로당 조직을 속속들이 일러바치고 백선엽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사형을 면하게 된다. 우리는 일본의 간계에 빠진 미국의 방해로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이승만 역시 친일 세력을 정리할 마음이 없어서 반민족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정리하려 하자 친일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급습, 해체하다시피 하여 끝내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다. 그때 친일 세력을 정리했더라면 일본육사출신 군인도 정리되어 박정희가 나라를 탈취하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제나 가장 힘이 센 편에 섰던 기회주의자 박정희가 이 나라를 가난에서 구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경제개발 5개면 계획은 민주당 정부가 만들어 놓은 것을 박정희가 그대로 진행했을 뿐이다. 새마을 운동도 그의 생각이 아니었다. 기업이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데 정부의 보증을 얻으려면 그 상당 부분을 군부에 내놓아야 했다고 한다.

18년 독재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수시로 재벌들을 불러 돈을 가져오게 했고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몇 번씩 뜯기느라 어려웠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왕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른 그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궁정동 안가처럼 여러 채의 안가를 두고 밤마다 여자들을 불러들여 성폭행을 일삼았다.

박정희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차지철을 통해 여자를 데려왔고 채홍사처럼 예쁜 여자를 찾아 박정희에게 바치는 역할을 했던 자들이 승승장구했다. 이 나라 역사 가운데 가장 악랄한 정치를 했던 인물이 박정희다. 제 뜻에 따르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고 내치고 죽였다. 쿠데타 설계자이자 동지인 조카사위 김종필도 여러 차례 외국으로 쫓겨 갔다가 돌아왔다.

 

박정희의 후예들

 

박정희가 죽자 그의 악랄한 정치를 보고 배운 전두환이 다시 1979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이 나라는 다시 신군부라는 집단의 독재 아래 놓였다. 1980년 전두환의 집권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산발적 시위가 시작되고 5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518일 광주 전남대에 모인 대학생들이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다. 이때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 1,000명 학생의 시위는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특수작전에나 투입하는 공수부대를 학생 시위에 동원하여 곤봉으로 때리고 질질 끌어가 적군 포로 다루듯이 진압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휴가도 외출도 못 하게 하고 날마다 시위진압훈련만 계속하여 불만을 최고조로 올려놓은 상태로 투입하여 학생과 시민에게 화풀이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경로를 보면 광주의 사건은 신군부가 오래 준비하여 촉발한 작전인 셈이다.

강력한 시민저항을 촉발하고 그것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군사통치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 군인들까지 희생시킨 신군부였다. 광주에서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지금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원혼들은 구천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세력을 정리할 듯했지만, 전두환과 노태우가 잠시 감옥에 가는 것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아직도 그들의 세력은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정치 일선에서는 야당의 일원으로 보수언론의 비호를 받으며 건재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짓도 서슴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 아직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는 자들이 건재하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숱한 변혁을 거치면서도 늘 전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고 박정희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독재도 청산하지 못했고 이명박근혜만 감옥에 있을 뿐, 그 추종 세력들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 그들을 석방하라고 외친다.

친일부터 군사독재, 국정농단까지 한줄기로 이어지는 보수언론과 선동정치의 맥을 자르지 않고는 이 나라에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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