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포만(茁浦灣)을 되찾자
줄포만(茁浦灣)을 되찾자
  • 신영배
  • 승인 2021.05.12 15: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영배 대표
신영배 대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줄포를 검색하면 변산반도 남부의 곰소만(옛날의 줄포만)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줄포는 곰소만의 어업중심지였으며, 특히 조기의 3대 어장 중 하나인 위도(蝟島)가 만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서해안의 주요 어항의 하나였다.

조기를 비롯해 새우ㆍ민어 등이 주로 어획되며, 양식업도 발달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항로는 위도ㆍ군산ㆍ목포 등지와 연결되며, 육로는 부안ㆍ고창ㆍ정읍 등지로 연결되어 연안항로의 주요기항지이며, 연안지역과 내륙지역을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물자의 집산지였다.

행정상으로 전라도 부안현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라북도 부안군 건선면에 속했다. 같은 해 줄포리가 줄포면이 되면서 줄포면의 관할 하에 들어 있다가 1931년 줄포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줄포만(茁浦灣) 역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된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줄포만을 곰소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줄포항이 토사가 밀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인근 곰소항이 그 기능을 수행하며 1990년대 초 젓갈 산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은 지리적 특성을 표시한 것

우리나라의 해안선은 구불구불, 들쑥날쑥해서 서해와 남해에는 숱하게 많은 만()이 있다. 광양만, 득량만, 옥포만, 해창만, 여자만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동해안에도 영일만 등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곳이 펑퍼짐한 지형을 이루면 만()이라고 부른다.

위에 소개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만()을 검색하면 분명하게 줄포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앞에 소개한 문구에 곰소만(옛날의 줄포만)’이라는 부분은 지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저 자기의 생각대로 기록한 게 아닌가 싶다. 공신력이 높은 백과사전에서 한 지역을 두고 서로 다른 기록을 하고 있으니 필자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찌됐던, 사전에서 줄포만을 검색하면 너비 약 7, 길이 약 17, 수심 10m 미만이다.’라고 개요를 적어놓았다. 자연환경은 개펄이 넓게 발달돼 있는데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은 부안군 쪽으로 많이 뻗어 있다.’라고 적혀 있다. ‘줄포만 내의 지형은 갯골이 평탄면 사이에 분포하는 펄 갯벌과 평균 기복이 10이내인 모래갯벌과 복합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했다.

지리적 특성을 말하는 만()은 행정구역이나 지역의 변천과 관계가 없다. 옛날에 줄포가 위도의 모항(母港)으로 위세를 떨쳐서 줄포만이 된 게 아니다. 줄포의 지형적 특성이 줄포만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줄포만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항구의 기능이 다해서 곰소항으로 넘어갔으니 곰소만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금은 곰소항도 수심이 낮아져 기능을 못하고 격포쪽으로 넘어갔으니 격포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곰소만이라는 호칭은 잘못된 것이다.

며칠 전에 인근 지역의 윤 아무개 국회의원이 지역방송 TV토론에 나와 줄포만을 곰소만이라고 지칭하는 걸 보며 화가 났다. 줄포가 과거의 명성은 잃었다 해도 지리적 특성마저 부인하며 곰소만으로 왜곡된 명칭을 사용하는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해안의 자연생태 문화중심지로

필자에게 줄포는 아늑한 어머니 품처럼 늘 그리운 곳이었다. 선창에 가면 인근 칠산바다에서 잡아 온 조기를 위판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어선들의 모습에 신이 났었다. 조기철이면 고깃배를 댈 곳이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몰렸고, 강아지도 입에 천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흔전만전하던 시대의 중심이 바로 줄포였다. 1930년대 줄포항은 돈이 몰리던 대단한 곳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32년 시장의 거래액이 부령면(부안읍) 125,900, 줄포면 762,300원이었다. 줄포에 경찰서와 식산은행, 곡물검사소, 병원, 극장, 학교 등이 들어서고 일본인들이 와서 사업을 벌이고 살았다. 버스가 4, 세단 자동차도 두 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줄포는 전북 서부지역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묵은 추억을 곱씹어 아쉬운 마음만 뒤적이려는 건 아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던 인물 김성수 일가(친일파였지만)가 줄포에서 살았다. 을사5적 이완용이 전라관찰사 시절에 해일로 큰 피해를 입은 줄포에 둑을 쌓은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등이 줄포에 남아있다.

개화기에 물산의 중심이던 줄포는 그저 쇠락한 항구로 치부해서는 안 될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지닌 곳이다군산이 근대화 유적을 보호해 관광에서 볼거리로 삼듯 줄포도 아직 남은 흔적을 말살하지 않고 보존하면 새로운 관광 트랜드로 개발할 가치가 있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여행지는 인기가 없다.

줄포자연생태공원과 람사르 습지, 부안의 매창과 석정 시인의 혼을 느끼고 조선 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로 평가받는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선생과 홍길동전을 쓴 허균 선생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홍길동전의 모델인 위도로 건너가서 파장금 파시의 추억까지 엮는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

눈과 귀와 마음이 함께 시대를 넘나들며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하는 중심에 줄포가 있어야 한다. 부안군의회 연구단체 부안군을 행복하게가 최근에 줄포면 도시재생예비사업 기본방향 연구등을 수행해 내놓은 줄포 역사와 갯벌생태공원을 연계한 문화관광 활성화 방안도 퍽 의미가 있어 보인다. 때맞춰 최근 줄포면지 발간을 위한 준비위원회가 발족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니, 결과가 기대된다.

줄포항은 고려청자를 실어나르던 무역과 곡물과 수산물 시장의 중심이었던 줄포의 역사적 인식과 현대의 생태문화관광이 이어지는 새로운 테마 관광 여행지로 개발할 때가 됐다그 초석은 줄포만이라는 지리적 명칭을 회복하는 데서 출발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줄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긴 잠에서 캐어나 줄포가 다시 서해안 정신문화의 중심으로 비상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쳐 준비하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