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많은 이에게 봄밤은 백야白夜다!”
“그리움 많은 이에게 봄밤은 백야白夜다!”
  • 전주일보
  • 승인 2021.04.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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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많은 이에게 봄밤은 백야白夜!”

 

보름인가 달이 만삭이다

 

지상에서 달과의 거리에

봄을 꽃 피우는 담화 같은 생이 있어

 

별 하나,

달의 그늘에서 잠을 설치시는지

밤을 도와 갈 곳 몰라 하던 새벽을 내게로 오시는지

 

서둘러 돌부리에 채인

달빛 부서져

가슴 언저리에 와 환하게 번지며 가쁜 숨을 고른다

 

두벌잠을 버리고

달과 별, 빛을 거느리고 깊어지는 밤

어둠이 조금씩 꽃 필 것이다

-최정선(1941~ 전북 완주)봄밤전문

 

  시적 정서라느니, 시적 정조라느니, 혹은 시적 분위기라는 게 있다. 한 편의 시는 결국 시인이 가진 정서의 산물이지만, 정조情操와 분위기에 따라 한 편의 시가 풍기는 맛은 사뭇 다르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는 바로 시인의 내면에서 막연하게 일렁이고 있지만 확연히 거머잡을 수 없는 정조와 분위기를 그려내는[形象化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조는 서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분별해서 보아야 한다.

  흔히 일반적으로 정조라면 情調정조를 생각하기 쉽다. 단순한 감각을 따라 일어나는 감정, 고운 빛에 대한 좋은 감정이나 나쁜 냄새에 대한 불쾌한 감정 따위를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시를 얼핏 감각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비롯한 예술작품은 단순하게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감정의 반응을 옮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창작에 쓰이는 정조는 情操정조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정조는 정신 활동에 따라 일어나는 고상하고 복잡한 감정을 일컫는다. 그래서 이런 정조는 지적 정조나 도덕적 정조, 종교적 정조나 미적 정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시적 정서나 정조 혹은 분위기는 단순한 감정 이상의 고상하고 복잡한 정신 작용이라는 과정을 거쳐 나온 반응이다. 이렇게 숙고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배려하지 않고 감정을 여과 없이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예술작품[]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봄밤은 그런 시인의 정조가 개성적인 톤tone으로 짙은 그림자를 담아내고 있다. 작품 전편에 흐르는 고상하고 지적인 감정이 한 편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시가 고도로 계산되고, 깊이 있게 사색한 결과라는 사실과 부합하는 대목이다. 그럴 때만 한 편의 시는 미적 창작물로서의 진실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보름인가 달이 만삭이다는 첫 행은 작품을 끌고 가는 화두가 되거나, 한 편의 시가 내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진술로 보인다. ‘만삭출산을 전제한다. “시의 첫 구절은 신이 내려준다(폴 발레리)고 했다. 이 작품에서도 첫 구절이 작품 전체에 내적 필연성과 일관성 있는 사유체계와 미적 은유의 원관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만삭의 보름달이 2연에서 봄을 꽃 피우는 담화 같은 생을 낳는다. 3연에서는 내게로 오시는 새벽이고, 끝 연에서는 어둠이 조금씩 꽃을 피울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러니까 첫 행, 첫 연에서 진술한 만삭의 보름달이 어둠을 밀어내고 담화 같은 봄밤을 피워낸 셈이다. 그러므로 봄밤은 그냥 어둠으로 채색되는 불길함이 아니라, 그리움이 꽃필 밝음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별똥별이 무시로 지듯 짧기만 한 여름밤은 고단한 생육의 밀도에 비례해서 쉽게 지새고 만다.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는 가을밤은 계절의 부피만큼 인생의 몸피도 헐거워지느라 담화를 낳을 겨를이 없다. 사위가 얼어붙은 겨울밤은 어떤 언사로 규정할 새 없이, 출몰하는 늑대 울음소리를 바느질하는 사이에 길고 긴 시름으로 지새우고 만다.

  그러나 봄밤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봄밤은 밤이 아니라 꽃으로 환하게 밝은 백야白夜일 수도 있다. 위도48˚ 이상인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백야를 우리네 처지에서는 봄밤에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리운 이를 멀리 두고 있는 이, 그도 아니면 보낼 수 없는 사람을 아주 멀리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 그도 저도 아니면 내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계실까불타는 꽃봉오리 가슴을 부여잡고 봄밤을 지새우는 청춘남녀에게 봄밤은 어둠이 아니라, 환하게 밝은 백야일 수밖에 없으리라.

  첫 행의 진술이 작품 전편에 놓칠 수 없는 담화를 피운다. 그것을 가능케 한 요인이 바로 봄밤의 정서를 승화시킨 정조의 힘이다. 차분한 번뇌마저도 환한 봄밤의 이미지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시적 정서에 농축된 정조의 승화다.

  무슨 담화를 피울 것인가? 한 송이 홍초[canna-曇華]일 수도 있고, 먹그림의 중요한 곳에만 채색하는 담화[淡彩畵]일 수도 있으며, 떠나버린 임과 나누는 이야기[談話]일 수도 있다. ‘두벌잠[아침에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을 버린 것으로 보아 달과 별을 거느리고 봄밤을 하얗게 밝힌, 임과 나눈 이야기일 듯도 싶다. 그래서 그렇다. 그리움 많은 이에게 봄밤은 백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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