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공부는 책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심호택(1947~2010 전북 군산)「똥지게」전문 |
‘이런 추억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가 이 시를 읽은 후 내 첫 반응이다. 그리고 쿡쿡거리며 혼자서 웃고 말았다. 일[노동]과 일꾼[노동자]를 천시하는 우리네 사고방식에 대하여 개탄했던 내 변설들이 생각이 났다.
시로 말하기 형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동시다발적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을까, 시로 말하기 방식의 현묘함에 무릎을 친다. 더구나 아무리 재미있고 신통방통한 진술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해도 그 독자 역시 각자 지니고 있는 체험의 차이, 생각의 줄기[가치관-세계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시를 읽는 동안에는 다름과 차이, 시비와 흑백을 불문코 읽을거리에 공감할 수 있는 글거리는, 시 말고 찾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필자만 해도 그렇다. 친지의 문상을 가보면 상주가 오히려 영정 사진 속의 부모님보다 더 늙어 보여 어안이 벙벙한 경우도 있다. 이는 순전히 필자의 가정사에서 촉발되는 감정이다. 조실부모한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남의 집 상사(喪事)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부모님이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며, 고령의 아들이 저렇게 건강하게 상주노릇을 할까”,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라고 지청구하며 매섭게 채근해 주실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런 가르침조차 누릴 수 없는 어린 나이에 전쟁의 참화 속으로 사라져간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발 시린 어린 시절을 보냈던가? 그 뒤를 이어 어린 6남매를 돌보며 지아비 없는 살림을 꾸리느라 도적처럼 온몸을 허무는 병마에 쓰러지신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손 시린 유년기를 보냈던가!
이런 처지를 겪은 독자에게 어머니의 지청구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잘못’이 아니라, 잊고 싶지 않은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훼손하고, 제 자식만 귀하게 여기는 망발이라 할지라도 그런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은 애절한 그리움 때문에 가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필자의 어머니가 오래 사셨더라면 ‘똥지게’를 천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 시대를 함께 살았던 분들의 추억담에 의하면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전쟁의 뒷마당 5,60년대에는 거지도 좀 많았던가? 어머니는 거지에게도 꼭 개다리소반에 먹을거리를 챙겨 행랑채 툇마루에서 식사를 하게 하셨다는 후문을 들었던 것 같다.
또는 농사일을 마치면 마당 가득 일꾼들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여 푸진 만찬을 벌이곤 했다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없는 사람들, 힘든 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누구보다도 많았고, 그것을 늘 삶의 앞자락에 간직하고 계셨다는 후일담을 들으며 자랐던 것은, 부모 상실의 빈틈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었던 추억담이다.
그래도 사농공상士農工商 의식에서 유발됐음직한 차별의식이 일[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차별의식마저 지우고 사셨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린 소견이었지만 ‘양반의식’이 그 내면의 가치에 준하는 실천의 무게보다는, 우선 ‘일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는 신분’이라는 잘못된 의식을 갖추게 된 것은, 필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커다란 병폐가 아닐 수 없다.
화이트칼라 white color족과 블루칼라 blue color족을 차별하는, 소위 ‘펜대 쥔 사람들’이 ‘작업복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는 이 전도된 양반의식이 21세기에도 만연한 채 굴러갈 수는 없다.
유럽의 강소국들처럼 블루칼라 족들의 임금이 화이트칼라 족들의 임금보다 더 많기를 바라기는 어려울지라도, 적어도 기름때 묻고 위험 앞에 노출된 사람들의 임금이 펜대 놀리는 사람들의 임금에 뒤져서는 안 되겠다. 더구나 일의 질이나 그 기능의 ‘쓸모’를 외면한 채 학벌 위주로 임금을 차별하거나, 성별에 따라 임금에 차등을 두는 현상만은 속히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하긴 노동의 가치보다는 ‘유령돈[증권]’이 거래되는 시대에 난감하기는 하겠다.
그렇다할지라도, 누군가는 냄새 고약한 똥지게도 져야 하고, 누군가는 온몸을 도구로 농사도 지어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깊은 땅굴로 내려가 석탄도 캐야하고, 누군가는 소도 잡고 돼지도 잡아야 하지만, “‘나만-내 자식만’ 아니면 된다.”는 의식의 뿌리에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천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과 하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 바람직한 공동체 의식이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가 그려내는 것처럼 참 ‘공부’는 책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으며, 진짜 가치는 ‘허위의식’에서 나오지 않고 ‘흘린 땀’에서 나온다는 것을 절감케 하는, 화자의 고백이 숙연해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