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대립, 그리고 언론
편견과 대립, 그리고 언론
  • 전주일보
  • 승인 2021.03.07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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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김 규 원/편집고문
김 규 원/편집고문

봄이다.

일부 지역에서 폭설이 내리고 강풍이 불었지만, 날씨는 포근해져 매화, 산수유가 피고 새싹들이 뾰족하게 얼굴을 내민다. 봄은 언제나 그렇게 꽃샘바람과 추위를 뚫고 우리 곁에 왔다. 이 좋은 계절 봄이 오면 열여섯 처녀 마음이 아니어도 싱숭생숭 들뜨고 지향 없는 그리움이 솟아나기도 한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그리운 계절이언만, 우리는 오늘도 마스크 뒤에 숨어 세상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백신 접종 차례는 언제쯤 올까, 백신 접종하고 죽은 사람도 있다는데 접종해도 될까? 등등 아직은 전혀 걱정거리가 아닌 헛걱정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일부 언론이 백신 접종 사망자 발생이라는 기사를 섬뜩하게 보도하여 두려운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에서는 아직 백신이 직접 사망원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백신 접종 후 몇 명 사망이라고만 보도했다. 물론 이런 보도는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언론들의 작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편견으로 뭉친 양대 집단의 대립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도저도 아닌 맹탕 중도 세력이 약간 있는 대립사회다. 누구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지만, 진보세력은 전혀 진보답지 않고 보수세력이라는 집단은 보수가 아닌 수구꼴통이라면 적당할 집단이다.

진보라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나와 내 이익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집단과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여 현재의 가치를 지키는데 몰입한다. 아무래도 보수에 가까운 사람들이 진보라는 명찰을 달고 막연하게 반대 세력에 맞서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정권을 쟁취하는 데 모든 것을 걸고 어려워진 민생을 자극하여 표를 얻는데 몰두하는 사람들. 대책없이 비난만 내세우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는 세력은 보수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권력을 좇아 걸핏하면 이합집산이고 당명도 걸핏하면 바꾸는 그들의 가치는 오로지 이다. 흘러간 힘의 시대를 그리워 한다.

 

정치도 언론도 그 중심은 국민이어야

 

지난 5일 조선일보가 창간 101주년을 맞이하였다고 했다.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100주년을 지나 101주년을 자축하는 방 아무개 사장의 기념사가 온라인에 떠돌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는 조선일보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했고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신군부 시대에도 핍박을 받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조선일보의 기사를 믿지 않게 된 현실을 반성하는 대목은 한 줄도 없었다.

기념사에서 시민단체와 정부편 언론이 조선일보를 “‘적폐이자 말살되어야 할 악()’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할 말은 한다는 정론 직필의 정신을 지켜왔습니다.”라고 했다. 그 할 말이 누구를 위해 할 말인지, 그 정론 직필이 누구 기준에서 정론이고 직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족벌 두 신문의 이야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아첨하고 선동하는 보도를 했었고 군부 독재와 신군부 독재 시대에 어떤 보도와 관계를 지속했었는지 소상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방 사장의 기념사를 보면서 자꾸만 그 영화의 내용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거대 신문의 느긋한 힘자랑만 이어졌다.

굳이 조선일보 창간사를 인용한 뜻은 오늘 중앙과 지방의 일부 유력 언론들이 보여주는 언론행태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론이 지향하는 목표는 바른 사회, 국민의 바른 판단을 위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데 두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 상당수 언론은 본디 사명을 저버리고 모기업을 위해, 지역의 토호(土豪) 세력으로 힘을 과시하며 사익(私益)과 사익(社益)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유력 언론의 힘은 행정 방향을 왜곡하며 겁박하기를 일삼아 폐해(弊害)로 지목되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민 보호

 

지난주 가장 큰 이슈였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직하면서 했던 말이다. 16개월 총장 재임 기간에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막강한 검찰권을 과연 국민을 위해서 썼는지, 아니면 철옹성 같던 검찰을 개혁하려는 정부 여당과 맞서는 데 사용했는지는 후일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검찰의 힘을 줄이려는 법무부 장관 2명이 낙마했고 청와대까지 압수수색을 당했다. 검찰이 보여준 힘은 칼을 쥔 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게 했다. 군사독재 시대에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민정수석의 지휘 아래 있던 검찰이 아니었다.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대척점에 서는 검사의 힘이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유튜브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하여 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도 다 못쓰고 병가를 얻은 일로 검찰에 압수수색 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나경원 전 의원은 십 수 개 혐의를 받고도 소환 한 번 안 당하고 무혐의를 받을 수 있는지 과외라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라고 했다.

나라 곳곳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해 공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오늘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집단의 이익이나 유불리에 따라 달라지는 건 공정이 아니다. 수사권은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가장 공정하게 써야 할 힘이다. 자의적 판단으로 그 힘을 사용한다는 의심이 있었기에 수사권 분리나 중수처 같은 대안이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국민은 가난하고 어려운 기층 민중을 포함한 사람들이고 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국민은 떵떵거리며 권력이나 금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계층이다. 나라 전체가 저마다 지닌 편견에 따라 갈려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다. 그러나 적어도 많은 수의 국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편견(?)이 이끄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어떤 권력이든 국민의 뜻을 거슬러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보호 대상으로 생각하는 건 봉건시대의 관리들이 목민(牧民)이라는 말을 들먹이던 시대의 유물이다. 국민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고 주인이다. 국민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공직을 맡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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