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호의 독후감 - 제국의 전략가(앤드루 크레피네비치, 배리 와츠 지음)
최영호의 독후감 - 제국의 전략가(앤드루 크레피네비치, 배리 와츠 지음)
  • 전주일보
  • 승인 2021.02.25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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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의 공산주의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체제 존속에 위협을 느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한 핵무기를 가졌으나,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을 만들고 잇따라 수소폭탄까지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핵무기라는 전략적 우위를 더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전면전이 없는 긴 전쟁, 냉전이 시작했다.

전략적 핵균형. 미국과 소련은 끝이 없는 핵무기 경쟁에 돌입했다. 멀리 떨어진 대륙에서 서로 핵을 쏠 수 있는 대륙간탄도 미사일, 핵잠수함, 스텔스 전략폭격기를 개발했다. 미국이 먼저 개발했지만 곧 소련도 따라왔다. 소련의 핵개발 전 소련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핵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핵공격을 당하면 소련이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누가 먼저 핵공격을 했는지 관계없이 모두가 파괴될 수밖에 없는 균형 상태가 됐다. 강력한 무기는 오히려 전쟁을 억제하게 됐다.

데탕트.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은 국내 반전 여론을 촉발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전략무기 제한 협상이 들어갔다. 데탕트 시점인 1970년대 후반 이미 소련의 군비 지출은 미국의 군비를 넘어섰다.

냉전과 서방의 체제 존속에 대한 위협은 수십 년간 계속됐지만, 오래된 냉전에 지친 미국의 국민, 여론, 정치인은 더 이상의 국방예산 증가를 반기지 않았다. 이 지루한 전쟁에서 아무도 미국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미국 냉전 시기와 냉전 이후 42년간 미국 국방부 총괄평가국 국장을 지낸 앤드루 마셜의 전기인 ‘제국의 전략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이다.

마셜은 소련이나 미국 모두 관료제하에 각 부처의 수요가 달라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조직은 가장 적합한 결정을 하기보다 가장 무난한 결정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 부처는 서로 예산을 따기 위해 노력했고, 부처 간 경쟁은 자신의 약점과 상대방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과 상대방의 현재 상황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총괄평가국이다. 서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눈앞의 예산이 아닌 장기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셜은 위와 같이 무한정 군비를 늘릴 수 없다는 제약 아래에서 냉전을 바라봤다. 냉전은 단순히 군비가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와 이념의 전쟁이라고 판단했으며, 늘어난 소련의 군비가 이 전쟁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게 탄생한 전략이 비용 강요 전략이다. CIA는 소련의 군비 부담은 전체 경제 규모의 6~7%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마셜은 CIA가 부처 이익 등 외부 요인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고 예상했다. 마셜은 10~20%라고 보았다(냉전 이후 그 비율은 35~40%였을 것으로 추산). 마셜은 비효율적인 경제를 운용하는 소련이 막대한 군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소련에 터무니없이 많은 비용을 지출하도록 강요하는 전략을 고안했다.

예를 들면 소련은 자국 영토에 폭격기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므로, 미국이 스텔스 폭격기를 개발하면 미국의 개발비용보다 훨씬 큰 규모의 방공비용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 효과가 10%가 넘어도 소련은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강조해 허술한 방어체계라도 소련에 큰 비용을 부담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소련은 전쟁이 아닌 경제, 내부 문제로 자멸했다.

앤드루 마셜의 활동에 특기할 점은 미국의 관료 체제이다. 1921년생인 앤드루 마셜은 52세인 1973년부터 96세인 2015년까지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8명의 대통령과 13명의 국방부 장관과 함께 미국 기밀 문서 열람과 국방부 장관에게 직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총괄평가국 국장으로 일을 했다.

다음은 민간의 역할이다. 앤드루 마셜은 처음부터 공무원이 아니었 RAND라는 민간 연구소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과학자와 사업가의 재능으로 신무기 개발과 군사적 역량 향상에 유래없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착안해 군과 학계, 산업계 간 지속적 협력을 위해 최고급 싱크탱크인 RAND를 출범시켰다. RAND에서 활동하다 마셜은 국방부 총괄평가국장이 되었다.

우리가 정권과 나이에 관계없이 민간의 창의와 효율을 믿고 직업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에게 오랫동안 주요 국가 업무를 맡길 수 있을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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