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마리
실마리
  • 전주일보
  • 승인 2021.02.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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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ㅜ필
문 광 섭/수필가
문 광 섭/수필가

실마리는 감겨 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를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시작부터 실마리 풀리듯 순조롭게 풀려가야 끝마무리도 매끄럽게 이뤄진다. 바쁘다고 해서 바늘허리 매서는 바느질이 안 되는 것처럼순리에 맞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일이 순조롭게 끝이 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만, 실마리를 쉽게 찾거나 찾아내는 방법은 지혜가 있거나 경험에 의한 기량, 또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오늘은 1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공연장 사용신청서 접수, 복지관 서류제출, 공과금 납부, K상가 조문 등 칠팔 가지 일을 마쳐야 한다. 시내 팔방에 있고 월말에다 교통체증, 점심시간, 소요시간 등을 잘 맞추어야 고생을 덜 하기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잘 끝내고 해 질 무렵, 문학계 원로였던 K 선생의 빈소에 들어섰다. 한참 젊었을 적 낯익은 영정사진을 보면서 인생무상과 영면을 빌었다. ‘코로나19’만 아니면 붐볐을 터인데 조용하고 한산했다. 젊은이들 십여 명을 제외하곤 나 혼자 우두거니 앉아 있기가 무료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선배를 기다려야 해서 출입구로 시선을 모았다. 평소 고인과 가까이 지냈던 문인들도 떠올려 보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질 않아서 안타까웠다.

 

30여 분 정도 무료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 빈소 입구에 망백(望百), 구순쯤 되어 보이는 등 굽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상주 이름이 적힌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잠시 뒤 분향을 마친 노인이 들어와선 나와 거리를 두고 대각선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주들이 특별히 모시지 않는 걸로 봐서 내가 얼핏 생각했던 집안 어른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면 노인은 고인과 어떤 관계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야 노인의 신분과 조문 온 동기를 알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수염을 길게 기르신 외양으로 봐선 유학자(儒學者)이거나 도인(道人)처럼 느껴졌다. 눈매 또한 날카로운 면이 엿보여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노인에게 계속 시선을 쏟기도 무안하여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데,

실례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술 한 잔 같이하십시다.”라고 내게 청하는 기운찬 음성이 내 귓전을 울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그러시죠.”

점잖게 앉아 있는 분의 처지가 자기와 비슷한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불렀노라며 술잔부터 내밀었다. 심심했고, 더구나 노인의 신분이 궁금하던 차 옳지 잘됐다싶었다.

초면에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고, 나 역시 노인에게 술잔을 권했다. 하지만, 고인과 어떤 관계인지 불쑥 말을 꺼내긴 쉽질 않아 기회를 보기로 하고 뜸을 들였다.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서울서 내려왔는데 밥 한술은 뜨고 가야 하겠고, 자기가 먼저 갈 줄 알았는데 후배가 먼저 떠나서 안타까워 술 한잔하려는 데 내가 생각되더라고 했다.’ 그 순간,

어떻게 후배 되세요?” 하고 물었다.

직장 후배요. KBS 방송국에서요.”

말문이 터지자 술잔을 주고받으며, 파란만장한 구십 평생의 역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쏟아졌다. 소주 한 병도 추가되었다.

 

실마리가 풀리니 언젠가 고인이 수업 시간에 내 직장 선배 한 분이 서울 사시는데, 매달 초하루와 신년 초면 꼭 먼저 안부 전화를 하시는 분이 있다고 자랑하던 일이 상기돼서 여쭸더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구순의 노인과 팔십 문턱의 나는 나이도 잊은 채 종갓(宗家)집 장독이라도 연 듯 진득하니 묵은 정()을 한없이 퍼내고 담는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원로스카우트 선배이신 k 교장이 고운 소리가 나려면 오래된 오동나무이거나 대나무여야 한다.’라며 나이가 구십이 되니깐 이제 철이 난 것 같다고 하셨다. 오늘 처음 뵌 삼곡(森谷) 선생님도 그렇지 싶다.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서 불원천리 한양에서 전주까지 노구를 이끌고 후배 영전을 찾아오신 거다. 먼저 떠난 후배를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열정(熱情)과 의리(義理)에 새삼 경의를 드린다.

(2021.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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