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속물근성에 대한 가차 없는 냉소”
“시, 속물근성에 대한 가차 없는 냉소”
  • 전주일보
  • 승인 2021.02.0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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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 희 시인
이 동 희 시인

 

     진열장 안에

내가 들어가 앉을 자리가 보였다

개뼈다귀 같은 것들이

지나가며 힐끔힐끔 생물을 들여다보았다

저건 비매품이요, 땅딸막한 주인이 말했다

생철지붕에 떨어지는

우박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끔 웃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김영태(1936~2007. 서울)통인가게전문

 

 

세상 만물은 모두 그 나름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이를 원하는 모양이나 기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편에 과학만능주의자들이 있고, 그럴 수 없다고 일찍이 선언 한 사람 중에 노자老子가 있다. 과학만능주의자들의 오만이 지금 하나뿐인 지구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25백 년 전 노자에게서 찾으려는 사람들로 인문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인문학의 대표 장르는 바로 []문학이다. 그런데 현대시에 대한 현대인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시란 본시 어렵지 않았는데 현대시는 왜 그렇게 어렵냐는 것이 불만의 핵심이다. 시란 원래 노래의 한 형태였는데 어렵기만 하다고 힐난한다면, 마치 각주구검刻舟求劍을 비유로 들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진 고사성어지만 굳이 설명을 덧붙인다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흘러가는 배 밖으로 칼을 떨어뜨렸는데, 그 칼을 찾기 위해 배가 움직이는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칼을 떨어뜨린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는 것이다.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것만 고집하는, 미련한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시대도 변하고, 그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는 사람도 변했는데, 시만 옛날 노래를 불러주기를 바라는 격이다.

또 하나, 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만의 두 번째 항목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공감의 대상이라는 점을 오해한 불만으로 보인다. 어떤 장르이든지 예술작품은 이해보다 공감이 앞서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감해 주기를 바라고 창작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시도 이성으로 이해하려하지 말고, 감성으로 공감하려 할 때 비로소 시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시에 대한 이런 소양을 전제로 이 시를 공감해 본다. ‘천재는 누구인가? 배철현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천재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찾아낸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일생 동안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 생각을 믿으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인류에게도 진실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믿음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찾아 소중히 지키는 삶의 모습이다.”<심연28>

이 설명에 의하면 이 시를 쓴 김영태 시인은 천재임에 틀림없다.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붙잡고 칠십 평생을 살아온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시와 미술, 음악과 무용평론, 그림-특히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핵심은 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태 시인의 글이나 초상화 등을 찾아보면서, 필명만으로도 벌써 어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닿을 수 없는, 가뭇없는 천재성 앞에서 얼마나 찬탄했던가? 거침없는 자유로움, 독창적인 붓놀림, 한정하지 않는 고고성, 예술적 선민의식, 그리고 속물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냉소가 그의 특성이었다. 그의 시는 이런 특성들이 시정신으로 집약되어 나타났을 뿐이다.

예술가와 예술품을 따로 볼 수 없다. 예술가나 예술품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누군가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그러니 골동품가게[통인가게]의 진열장 안에 들어가 앉을 자리는 예술가의 마땅한 자리다. 그런데 볼만한 사람들이,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자[감상자-애호가]들이 보면 좋으련만, 개뼈다귀[속물]들이 힐끔거리며 [살아 있는 정신]생물인 예술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예술가는 이게 참 난감한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한 냥의 푼돈과 아전은 고사하고 가마꾼 자리만 준다 해도 정신은 고사하고 밑천까지 내주는 이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천금만금을 준다 해도,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를 준다 해도 팔 수 없는, 팔지 않는 예술가와 예술품이 있다. 그래서 예술이 아니던가!

앞에서 인용했던 배철현 작가의 한 말씀만 더한다. “내가 축하해야 할 대상은 나와 무관한 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유일한 임무를 찾아내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예술가[시인] 말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것을 진즉에 터득한 시적화자[김영태 시인]은 시 안에서 생철지붕에 떨어지는 우박 같은 소리를 내며웃는 것이다. ? 사람은 가끔 까닭 없이 웃고 싶은 때가 있긴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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