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중 사랑
까마중 사랑
  • 전주일보
  • 승인 2021.01.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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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지난 늦가을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 오후에 공원에서 낙엽을 촬영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하릴없이 돌아오느라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우리 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걷다가 우연히 옆동 1층 베란다 아래에서 작은 식물이 눈에 뜨였다. 5남짓, 손가락보다 작은 식물이 조그맣게 하양 꽃을 피우고 있었다. 본디 줄기는 예초기에 잘리고 옆구리에서 새순이 돋아 잎새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신기했다.

봄부터 작은 풀꽃을 촬영하기 시작해서 식물도감을 몇 차례나 보면서 웬만한 식물은 알만하다 싶었는데 이건 도대체 모르는 식물이다. 일단 스마트폰으로 식물 이름을 검색했지만 엉뚱한 꽃 이름만 보여주어 알 수 없었다. 난 자리로 보아 생명력 강한 잡초려니 싶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추워지는 가을에 덜 자란 어린 풀이 꽃을 피운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카메라를 꺼내서 접사촬영을 하려니 번잡하게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라 곤란하다. 궁리 끝에 집에 가서 장비를 내려놓고 꽃삽과 비닐봉지를 챙겨 나왔다. 아예 집에 심어놓고 촬영도 하고 신기한 꽃을 언제까지 피우는지 보자는 생각이었다. 조심스럽게 꽃삽으로 떠낸 식물을 집에 가져와 작은 화분에 옮겨 심고 물을 주었다.

척박한 자리를 벗어나 화분에 이사 와서 살만하다는 듯 녀석은 팔팔하게 서서 예쁜 꽃을 자랑한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손전등을 비추어가며 앙증맞은 작은 꽃을 몇 번이나 촬영했다.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운데에 노란 암술이 우뚝하고 수술은 보이지 않았다. 더 작은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 있는데 알 수 없는 꽃이다.

촬영한 꽃 사진으로 검색해봐도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쪼끄만 녀석이 꽃을 피우는 게 신기해서 자주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물을 주며 관심을 쏟았다. 그렇게 코로나 방콕에 지친 나와 새롭게 만난 작은 식물의 동거가 시작됐다. 동양란 화분이 유일한 룸메이트였는데 작고 신원불명의 신입생이 들어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 일이 대견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베란다 창가에 화분을 두어 볕을 쬐게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추위를 피해 방에 들여다 놓았다. 자라면서 새잎과 함께 꽃눈이 몇 개 함께 나와 열심히 꽃을 피우는 녀석은 겨울을 모르는지 잘 자랐다. 잎이 제대로 자라면서 모양이 잡히는데 어딘지 눈에 익다. 잎이 나오면서 꽃가지가 함께 나와 열심히 꽃을 피우는 녀석, 꽃이 지는가 싶으면 그 위에 새로 꽃가지를 내는 꾸준함이 신기했다.

처음 식물 이름 검색할 때는 잎이 모양을 갖추지 않아 검색조차 불가능했는데 늘 보살핀 덕분인지 잎이 갖추어지고 제대로 식물다운 모양이 나왔다. 스마트폰의 식물 이름 검색 어플을 열어 검색해보니 까마중이란다. 잡초 가운데 번식력이 아주 강한 까마중, 자라면서 계속 열매를 맺어 씨를 퍼뜨리는 그 녀석이었다.

처음 피었던 꽃자리에서는 이미 까만 열매가 두어 개 익어가고 있다. 그렇게 까마중 한 그루가 내 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제법 자라서 키가 20가량 되었고 한꺼번에 8~9개의 하얀 꽃이 핀다. 개미도 벌레도 없으니 솜을 비벼 내가 대신 수정시켜 열매도 몇 개 달렸다.

동양란은 3년째 정성을 다해 보살펴왔지만, 새 촉은 몇 개 나왔어도 꽃 한번 보여주지 않았다. 볕을 쬐어야 한대서 아침햇살을 열심히 비쳐도 냉랭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까마중은 자라면서 꽃을 피우는 게 본분이라는 듯 끊임없이 꽃을 피우니 잡초일망정 하는 짓이 예쁘다.

이 겨울에 열심히 꽃을 내서 내게 보답하는 룸메이트 까마중, 키가 자라서 제 몸을 가누지 못해 지주를 세워주기도 했다. 꽃이래야 5남짓이지만, 하얗게 핀 꽃을 들여다보노라면 코로나블루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생명의 의미를 느끼기도 한다.

까마중이면 어떤가? 장미를 들여다 놓았어도 이 시기에 꽃을 보여주지 못했을 터이니 내겐 과분한 친구를 둔 셈이다. 밤이 지나면 아침 햇살에 활짝 핀 하양 꽃을 보여주는 까마중을 향한 내 마음은 작은 위로를 구하는 슬픈 구애 같은 것일 듯하다. 아직도 먼저 간 아내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내 마음 한 줌을 겨울에 핀 까마중 꽃이 슬쩍 훔쳐갔다. 홀로 노인이 되어 쓸쓸한 삶이 몸에 밴 나를 작고 여린 꽃으로 위로하는 까마중을 향한 이런 마음도 사랑일까?

재만 남은 가슴에 불씨를 뒤적거리는 갈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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