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공성인 인간이 그래도 남길 수 있는 것”
“시, 공성인 인간이 그래도 남길 수 있는 것”
  • 전주일보
  • 승인 2021.01.18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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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좋은 삶
油然 이동희 시인
油然 이동희 시인

 

 

, 공성인 인간이 그래도 남길 수 있는 것

 

이 집은

하세월 완공의 기약이 없고

시인은 단 한 장만

그의 벽돌을 얹을 수 있다

 

혹여 국법으로

문학을 금해라도 준다면

야릇하게 가끔 꿈꾸며

혼신으로 벽돌을 굽고 구워도

한사코 숯이라

한사코 사금파리여라

시인은 준열히 자책하며

그 허무를 운다

 

문학일래 참담하였다고

시인은 생애의 고백을 남긴다

아울러

문학일래 기쁨이었다고

 

-김남조(1927~. 대구)문학사전문

 

*이런 시를 한 편쯤 남기고 싶긴 하다. 문학 작품으로 말하는 문학론, 시로 쓰는 시론이 한 편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생을 붙들고 애걸복걸해 온 애인처럼, 혹은 웬수처럼 떼려야 뗄 수도 없고, 밀어내어도 밀려나지 않는, 끈질기기가 찰거머리 같은 시문학에게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절절한 별사 한 편쯤은 남겨야 시[문학]대접일 수 있고, 사람[시인]대접 일 수 있겠다.

누구나 한평생 살아온 자기 인생에게 단 한 마디 별사를 남기라면 뭐라 할 것인가? 누구는 필력 좋은 대필업자를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고, 누구는 몸뚱이로 살아온 인생을 어떻게 이바구[口述]로 풀어낼 수 있겠느냐며, 그것은 계면쩍은 노릇이라고 한사코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는 덥석 주문을 받아 일기장의 한 면을 들이밀거나, 혹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닮은 인생사를 주저리주저리 읊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다. 나의 문학 인생은 이랬노라고, 내 시의 삶은 이랬노라고 언설하는 순간 인생은 문학으로 편입되고, 별사는 또 다른 시로 승화되어 나를 떼어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명한 무명 시인으로서 나도 이렇게 내 인생을 문학사로 편입시킬 수 있는 단 한 편의 시를 별사처럼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남기고 싶다고 다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쓴다고 다 불후의 명작이 아니 되는 것처럼, 언어화 문자화한다고 다 시가 되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문학이 그렇게 꼭 완성되고 형상화되어야만 하는 노릇은 아닌가 보다. 저 독일의 시인 Gottfried Benn(1886~1956)은 이런 시를 남겼다. “아득한 곳에서/ 그 씨앗이 싹틀 때,/ 그대 그것을 수확하지는 못하리,/ 그대의 모습 이미 흩날려 사라져버린 지 오래이므로.” (형식-의 부분) 아득한 세월 언저리에서 척박한 서정의 텃밭을 일구고 가꾸며 씨앗[詩心]을 뿌렸다. 어쩌다 몇 포기 새싹[]이 텄다. 그래도 농부[시인]는 끝내 그것[시문학]을 수확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인생은 시문학보다 그 생명이 훨씬 짧기 때문에, 시의 수명만큼 인생의 길이가 길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시의 씨앗을 뿌리되 시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고 했겠다. “이 집은/ 하세월 완공의 기약이 없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허무를 수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본질은 그렇다. 어디[삼라만상 어느 공간]에도 나는 없으며, 언제[과거 현재 미래 어느 때]라도 나는 없다. 그래서 공성空性이요, 무아無我가 정답이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눈으로 시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다고 해서 모두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지는 않다. 그래도 농부는 마음 밭을 묵정밭으로 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긴 누가 하란다고 하지도 않으며, 누가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제 멋에 겨워하는 행위가 바로 시를 사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혹여 국법으로/ 문학을 금해라도 준다면한사코 금하는 노릇을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이 시요, 시인이다. 국법으로 금하면 금할수록 금하는 벽돌을 구우려 하는 자, 아니, 국법으로 권장하고 상을 주고 자금을 대어줄수록 빈둥빈둥 시를 살지 않는 자, 그 자를 일러 비로소 시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래야 비로소 空性이요 無我그 허무를 [제대로]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혼신의 힘을 다해 구운 벽돌[]은 참담한 고백의 대상도 되며, 기쁨을 구가하는 노래도 될 수 있다니, 할 수만 있다면 벽돌 굽는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긴 없는 것이다. 세상이 空性이요, 내 한 몸이 無我인데 슬픔과 안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벽돌 한 장 제대로 구울 수만 있다면, 허무를 대신할 용체容體로 쓸 만하다 할 것이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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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아호; 油然.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전북시인협회장, 전북문인협회장, 표현문학장 등 역임

*시집빛더듬이7. *평론집문학의 두 얼굴5. *수상록시심으로 읽는 세상4권 등

*목정문화상[문학부문], 35회 윤동주 문학상 등 수상

*현재; <부안문예창작반> <유연문예교실> 지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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