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로록 쪼록, 톡…’ 낙숫물 소리
‘쪼로록 쪼록, 톡…’ 낙숫물 소리
  • 전주일보
  • 승인 2020.11.2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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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 만/수필가
이 용 만/수필가

쪼로록 쪼록, 쪼로록 톡……

휴일에 집에 혼자 있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였다.

웬 물방울 소리?’

집안을 둘러보니 제대로 잠그지 않은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문득 그 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귀에 익었다. 고개를 갸우뚱해가며 생각을 해보았지만 알듯 말듯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수도꼭지를 틀어 소리를 내게 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쪼로록 쪼록, 쪼로록 톡……

그래, 그 소리야. 낙숫물 소리. 바로 그 낙숫물 소리였다. 시골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 다시 싱크대에 물을 가득 채우고 수도꼭지를 살짝 틀어 쪼르륵 쪼록 낙숫물 소리를 만들어 놓고 귀를 기울였다. 반가웠다. 아늑했다. 희한하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는 어느새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어린 소년이 되어 고향집 초가지붕에서 토방 아래 빗물받이 마당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고 있었다. 높지도 않는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여기저기 둥근 물거품을 만들어 내면서 쪼르륵 톡 낙숫물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달걀 만하게 만들어진 물방울들은 잠시 빗물을 따라 떠내려가다가 풍선이 터지듯이 사그라지기도 했고 어떤 것은 만들어지자마자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맞아 톡 터져버리기도 했다.

쪼르륵 쪼록, 쪼르륵 톡.”

나는 작은 소년의 모습으로 토방 끝에 앉아 막대기로 방금 만들어진 물방울들을 터트리고 앉아 있다. 때로는 긴 바지를 입은 좀 큰 소년으로 앉아 있기도 하고 밑 터진 바지를 입고 고추까지 내놓은 아주 작은 소년이 되어 앉아 있기도 한다.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후근이, 강열이 등 내 또래 아이들과 같이 앉아 있기도 한다. 어느 땐가는 목침을 높이 벤 아버지가 마루에 누워 계시기도 하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소쿠리에 감자를 쪄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떨어지는 물방울에 정신을 쏟다 보면 어느새 뒷집에 사는 선들 양반이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뻑뻑 담배를 피우고 있기도 하고 지금은 멀리 이사를 가서 살고 있는 법촌댁이 우산을 받고 마당으로 들어서기도 한다. 지금 오는 비가 보리에는 해로울 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봄비가 오고 있을 때이고 올해는 비가 너무 자주 와서 벼 도열병이 심할 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여름철 장맛비 올 때다. 그나마 선자 얻어 지은 농사가 실농을 하여 겨울양식도 건지기 어렵게 되었다는 한숨소리가 들릴 때는 가을이다.

너 추운데 거기서 무슨 물장난을 그렇게 오래 하냐?”

아버지가 방 안에서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며 말할 때는 겨울인 것이다.

낙숫물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봄에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에서 생기는 낙숫물 소리도 정겹고 여름철 소나기 내릴 때 들리는 낙숫물 소리도 성급하기는 해도 그런대로 듣기 좋은 소리다. 겨울철 지붕을 덮었던 눈이 녹으면서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도 그런대로 정취가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낙숫물 소리는 여름철 아침부터 내리는 장맛비 끝에 들리는 낙숫물 소리가 제격이다. 모내기도 끝난 후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아예 들에 나갈 것을 포기하고 아침밥 먹자마자 목침 높이 베고 누운 아버지가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며 한잠 주무시다가 잠에서 깰 때쯤에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어머니가 감자를 쪄 오거나 보리를 볶아 올 때쯤에 들리는 낙숫물 소리야말로 진짜 그리운 낙숫물 소리다.

쪼르륵 쪼록, 쪼르륵 톡

방 안에서 두 다리 쭉 뻗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 무심히 듣는 저 소리, 그 소리야말로 가장 맑은 소리요 조용한 고향의 소리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그래서 빗소리가 더 잘 들렸고 낙숫물 소리가 정겨웠던 것이리라. 이제 다시 고향집에 가서 빗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때의 낙숫물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물방울 떨어지던 적당한 높이의 초가가 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그 소리를 그대로 재연해 준다 해도 이미 녹슬고 때 묻은 이 마음 안에 그 소리가 맑게 들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 싱크대에서 들려오는 낙숫물 소리도 초가지붕 끝에서 들려오던 소리와 같은 소리는 아니다. 하기야 달걀만한 물거품을 만들어 내기는커녕 콩알만 한 물거품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저 싱크대의 물소리가 어찌 옆엔들 갈 수 있으랴. 그러나 어찌하랴. 그나마 싱크대에서 나오는 낙숫물 소리마저도 이리 반가운 것을.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 물방울을 만들어 내려다가 실패하고 세제로 쓰고 있는 퐁퐁을 몇 방울 떨어뜨려 보았다. 행여 비눗방울이라도 생길까 해서다. 비눗방울은 수도 없이 발생하지만 낙숫물 소리는 오히려 더 이상해져 버렸다. 다시 세제 섞인 물을 흘려보내고 새 물을 받는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조절하여 낙숫물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눈을 감는다. 그래, 소리가 좀 다르면 어떠하랴. 도시 한복판 주방에서 낙숫물 소리를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인데……. 이곳을 수없이 드나들었어도 무심히 흘려버렸던 소리가 아닌가. 다시 비 내리는 시골 고향마을이 보이고 고향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인다.

쪼르륵 쪼록 쪼르륵 폭……

참 좋다. 아늑하다.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남자가 주방에서 설거지 좀 하면 어떠랴. 이렇게 아득하게 잃어버렸던 낙숫물 소리를 되찾았는데.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마음 편하게 먹고 낙숫물 소리나 실컷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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