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전주의 자긍심이자 전주의 미래
전라감영, 전주의 자긍심이자 전주의 미래
  • 김주형
  • 승인 2020.10.0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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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주의 자존심을 지킨 전라감영이 돌아왔다, 7일 재창조 복원 기념식
- 전라감영 복원 통해 전주의 역사적 위상 회복하고 한옥마을과 연계한 구도심 활성화 기대
전라감영 선화당 전경 /사진=뉴시스
전라감영 선화당 전경 /사진=뉴시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주의 자존심을 지킨 전라감영이 돌아왔다.

비록 조선시대 때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전라감사가 업무를 본 선화당 등 핵심 건물들을 갖추고 옛 위용을 드러냈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라도를 관할한 관청이었다.

다른 감영과 달리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당시 전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이런 전주의 위상을 회복하고 새로운 전주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전라감영, 왜 전주였나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친 말이다. 그렇다면 전라감영이 나주가 아닌 전주에 설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종실록에는 ‘평안도 평양감영, 전라도 전주감영, 강원도 원주감영, 황해도 해주감영 등이 모두 서울에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전주가 나주보다 한양에서 가까웠던 게 그 이유라는 것이다.

전주가 교통의 요지이자 생산물이 풍부했다는 것도 이유였다. ‘감영을 설립할 곳으로 나주는 하도(下道)에 치우쳐 있어 온편치 못하고 전주는 상도(上道)에 치우쳐 있으나 영남과의 접경이 멀지 않으며 호서와도 가깝고 물력(物力)도 나은 듯하다’는 선조실록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것도 또 다른 이유로 꼽힌다.

전주는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李翰) 등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다. 비슷한 예로 함경감영이 있다. 함경감영은 함흥에 설치됐다 영흥을 거쳐 다시 함흥으로 옮겨졌는데, 함흥은 태조가 살았던 곳이고, 영흥은 태조가 태어난 곳이다.

함경감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감영들이 임진왜란 등의 이유로 터를 이리저리 옮긴 것과 달리 전라감영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전주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500년 통치, 그리고 재창조
감영은 관찰사, 도백(道伯) 등으로도 불렸던 감사가 행정권은 물론이고 군사권과 사법권까지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곳이다.

전라감영에는 전라감사가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한 선화당과 연신당, 감사 가족들이 지낸 내아와 내아 행랑, 비서실장 격인 예방비장이 일하는 응청당, 보좌관 격인 비장들의 집무실인 비장청 등이 있었다.

관찰사 심부름꾼이자 전주대사습놀이 주역으로 알려진 통인들 대기소인 통인청,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 법률을 다루는 검률당, 한지를 만드는 지소, 책을 출간하는 인출방, 진상품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도 있었다.

전주는 1896년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고 제주가 분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라감영은 1951년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완전히 사라졌다. 전라감영이 사라진 지 1년 뒤인 1952년 감영 자리에 전북도청사가 들어섰다.

전라감영 복원 논의는 전북도청사 이전 계획이 확정된 1996년 시작됐다. 전라감영은 도청사가 철거된 뒤 2017년부터 104억원이 투입돼 한국전쟁 중 폭발사고로 사라진 지 약 70년 만에, 복원 논의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복원됐다.

새로 태어난 전라감영에는 웅장한 외관과 우아한 곡선의 팔작지붕이 돋보이는 선화당과 내아, 내아행랑, 관풍각, 연신당, 내삼문, 외행랑 등 7동의 핵심건물이 들어섰다. 선화당 내부에는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공사관 무관인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의 사진자료를 재현한 6폭의 디지털 병풍이 있다.

선화당 동쪽에는 관찰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누각인 관풍각이, 선화당 북쪽에서는 200년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회화나무 근처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취하던 연신당, 관찰사 가족들이 지내던 내아와 내아행랑이 있다. 다가공원에 있던 전라감사 선정비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주의 자긍심, 전주의 미래
전라감영 복원은 단순히 선화당 등 핵심건물 복원의 의미를 넘어선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2016년 전라감영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옛 전북도청사 부지가 단지 조선시대의 전라감영 부지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부터 1300여 년간 관청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고 밝혔다. 전라감영 터가 적어도 1300년 동안 주변을 통치했던 중요한 곳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주와 전북에서는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가야와 백제, 후백제, 동학농민혁명 등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주시는 전라감영을 전주의 미래가 담긴 핵심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전라감영 진상품을 손수 만드는 체험 교육과 전통음악 공연도 하고, 전주대사습놀이 무대도 만들기로 했다. 특히 한옥마을과 풍패지관(객사) 등을 연결하는 관광벨트 구축을 통한 구도심 활성화에도 공을 들일 계획이다.

 

▲김승수 전주시장 인터뷰
"전라감영 복원은 단지 건물만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속에 깃든 정신과 가치, 오랜 세월과 삶을 함께 복원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에 맞게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7일 열린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 기념식에서 전라감영 복원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 시장은 "전주시민은 물론 전복도민의 염원을 모아 추진한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은 호남을 넘어 제주까지 품었던 관아,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했던 그 중심터의 역사적 무게를 오롯이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라감영은 동학농민혁명의 승전지이자 백성이 하늘이라는 위대한 뜻을 펼친 곳으로, 아시아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촉발시킨 역사적 장소이다"면서 "왕조를 잉태한 땅이자 민중이 일어선 전주의 의이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북도청사 이전 계획을 세운 1996년부터 지끔까지 25년 동안 한결같이 응원하고 추진해준 행정과 정치, 전북도민 모두애게 감사드리며, 전라감영 재창조복원위원회 이명우 위원장과 최기영 대목장 등 복원에 참여한 장인과 전문가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시장은 "오늘 전라감영 부분 복원으로 첫발을 떼었다"면서 "앞으로 전라감영 복원의 완성도를 높여감은 물론 왕의 도시이자, 민중의 도시인 전주의 겸손하지만 담대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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