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호의 독후감 – 아내의 독후감(윤석영 지음)
최영호의 독후감 – 아내의 독후감(윤석영 지음)
  • 전주일보
  • 승인 2020.08.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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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하게 써 낸 아내의 진주혼 기념문집, 부조리와 갈등에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
최영호 /법무법인 모악 대표 변호사
최영호 /법무법인 모악 대표 변호사

아내는 6세인 첫째가 걷는 모습만 보고, “곧 똥을 쌀 것 같다.”고 했다. 룰루랄라 놀고 첫째는 “똥 안 마려워.”라고 했고, 나는 심드렁하게 ‘왠 똥!“ 하며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첫째가 “아빠, 똥!” 하며 내게 왔다.

내가 냉장고를 향해 걷고 있을 때, 아내는 “OO 냉장고에 없다.”고 말했다. 집에서 돌아서며 걷는데, 아내가 “OO 생각하지 마.”라고 말했다. 아내는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걸 말로 꺼냈다. 혹시 내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온 건가 싶어서 “내가 혹시 말했어?”라고 물었고, 아내는 뭐 저런 바보가 있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요새 독심술 배워?”라고 웃으며 넘겼지만, 진짜 내 생각도 읽는 건가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아내는 내 대학 후배로 20대 초반부터 알았고, 30대에 4년 정도 연애하다 결혼했지만, 결혼 후에도 사실 우린 서로를 몰랐다. 많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어수룩하며, 성격만 예민한 서울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작은 일에도 건건히 부딪치며 알지도 못하면서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 아내가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내가 대체로 나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웠다. 가족과 가정에 대한 이해가 나보다 깊었고, 사회생활이란 이유로 밖으로 눈을 돌리는 나보다 가족에 관심을 더 많이 두었다. 가족으로서 아내는 내 부모와 형제를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회생활은 적었지만, 남자의 투박한 정서와 감정으로 알 수 없는 타인의 태도와 상황을 이해했다.

첫째의 대변시기와 작은 표정 하나 놓치지 않았고, 나에 대한 독심술도 그러한 관심과 이해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는 인생에서 나와 아내, 그리고 자녀, 가족과 가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줬다.

뜬금없는 고백이다. 그 시작은 대학원 은사님과 오랜만에 가진 저녁 자리이다. 교수님은 본인의 아내가 책을 썼다고 했고, 책의 제목은 '아내의 독후감'이었다. 다음날 필자는 동기들에게 나눠 줄 책까지 넉넉히 구매했다.
 
책의 제목이 여자, 딸, 엄마의 독후감이 아닌 '아내'의 독후감으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에 적힌 '진주혼 기념문집'은 결혼 30주년을 의미했다. 저자는 30년 결혼생활을 기념하며 남편에 대해 글을 책으로 엮었다.

남편이 처음으로 친정집에 인사 오던 날, '키 큰 남편이 겅중겅중 걸어올 때마다, 꽃다발 속 주홍빛 기다란 글라디올러스가 흔들흔들 춤을 췄다.'라는 낭만적인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하지만 낭만적인 문장은 시작과 함께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힘들었던 유학 생활, 시댁과의 갈등, 불안정한 주거 등 고단했던 생활과 가족이 된 남편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어진다.

'평생 사회 과학을 공부하며 자칭 좌파라고 했지만, 부부와 가족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가부장적',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 둘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기보다는, 상황을 회피’, 퍼플 잡(purple job,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유연근무제도)"을 연구했던 남편에게도 집안일은 아내 일', '남편은 타인에게 좋은 남자이긴 했지만, 나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등 아내는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해 얘기한다.

처음에는 책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읽는 중에는 ‘남편을 공개적으로 혼을 내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이 책은 저자가 남편에게 보내는 요즘 말로 ‘30년 찐사랑’의 증표임을 알게 됐다.

이 책은 세상 누구보다 남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편 전문가인 아내가, 30년 동안 남편을 생각하고 관찰한 기록물이다. 책에서는 남편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서운한 감정이 공존하지만, 그 배경은 여전히 나뭇잎을 주워오고, 전화로 계곡 물소리를 들려주며, 팔베개로 재워주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다.

문득 책을 읽고, 사랑은 상대방의 좋은 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수없는 부조리, 갈등, 반목,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것일 거라고 결혼 7년 차에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을 읽은 지인 모두 자신의 가족과 가정, 시댁, 시대를 돌아보며 얘기를 나눴다. 그만큼 남편과 가족을 주제로 진솔하면서도 잘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아내가 ‘아내의 독후감’을 쓴다고 하면 ‘굳이 글로 하지 말고, 말로 하라’고 설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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