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입’이 있다면
‘진실의 입’이 있다면
  • 전주일보
  • 승인 2020.06.0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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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고고학자들이 고대 바빌로니아문명의 점토벽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판독하면서 소개한 고대인의 인생관은 흥미롭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 쓰고 죽자, 그러나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러니 저축도 하자.’ ‘결혼은 행복한 것. 그러나 이혼은 더욱 행복한 것.’ 그 이전 동굴인류의 낙서 내용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큰일이다.’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동서와 고금, 소시민과 영웅이라고 어찌 다를까.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하지만 중국의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 사마천은 <사기(史記)> ‘열전의 첫머리에서부터 하늘의 도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말하지만, 천도(天道)가 있다면 어찌해서 백이·숙제 같은 어진 인물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굶어죽은 반면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고기를 잘게 썰어 먹은 도척(盜跖)은 천수를 다 누렸냐는 것이다.

 

구멍 난 천도(天道)천망(天網)‘

 

천도(天道)가 바로 서지 못하고 천망(天網)에 구멍을 뚫리는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 공자는 소인배와 사이비가 득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 유형으로 소문()과 향원(鄕原)을 들고 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소문()겉으로는 인덕을 좋아하는듯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한 인물이다. 관리가 될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하고 집에 있을 때도 명성을 취해 세상의 덕을 어지럽히며 개인적인 부귀공명을 탐하는 소인배다.

공자가 소문보다 더욱 혐오한 이는 향원(鄕原)이다. 남의 마음을 내 마음 같이 헤아리라며 서()의 도를 설파한 공자도 그에 대해서만큼은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유감스러워 하지 않을 자는 바로 향원이다. 향원은 덕의 적(德之賊也)’이다.”고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왜 그토록 향원을 혐오했을까. 최고의 덕이 변질될 때 최악으로 전락하는 위험성 때문이다.

군자는 공자가 그린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부단한 수양으로 어진 성품과 높은 학덕을 갖춘 덕치의 적임자다. 그렇다고 출세와 명예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시의가 맞으면 박시제중(博施濟衆), 세상으로 나가 널리 덕을 베풂으로써 뭇 백성을 구제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물러나 조용히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살아도 그만이다.

반면 향원은 탐관이나 아첨꾼처럼 일별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소인배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놓고 보면 흠 잡을 데가 없어 고을 주민들 모두 입을 모아 칭송한다.

그의 위장술이 얼마나 교묘하던지 맹자나 주희 같은 아성(亞聖)들조차 경계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

맹자는 비난하려 들어도 비난할 것이 없고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것이 없다. ()함에는 충신(忠信)한 것 같으며, 행함에는 청렴결백한 것처럼 보여 여러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고 그 분식된 인품을 말한다. 주희는 한 지역 내의 원인(愿人) , 근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도덕적 삶의 모범으로 칭송 받는다라고 그 위장된 모습을 그렸다.

가장 속물적인 인간이 최고의 덕을 가장했으니 그 악폐는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 음험하게 세상에 아부해서 얻은 세평을 내세워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속된 무리와 한 패가 되어 이상적인 개혁을 실현하려는 행도지사(行道之士)의 앞길을 저지하고 방해한다.

 

진영에 따라 갈리는 윤미향 의혹

 

향원과 소문 같은 사이비와 소인배가 득세하는 것은 그저 옛날 일이던가. 우리 사회가 각종 의혹을 둘러싼 편 가르기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같은 사안을 두고 여와 야, 언론과 언론, 시민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정 반대의 논조를 펼치며 대립하고 있다.

문제는 소인배를 두고 펼치는 논쟁이 아니다. 그들의 얄팍한 위장술은 국민들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자와 향원 등 사이비 급 인사들이 야기하는 의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중심에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이 자리하고 있다. 정통 종교인 불교 조계종과 여권의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당선된 정의연 전 대표가 관련돼 있다.

물론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다. 사실을 놓고 보는 시각에 따라 가치 판단을 개입시키면 주관적 진실이 된다. 그래서 핵심 사실을 포함해 모든 주변사실을 사심 없이 판단하는 객관적 진실을 수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토론과 논쟁의 과정 및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의혹의 핵심 인물인 윤미향 전 대표는 모든 의혹을 부인하며 검찰 수사를 통해 사실 관계를 밝히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제 의혹의 진위는 검찰이 파악하는 실체적 진실과 법원의 판결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게 됐다. 관건은 수도 없이 나열되고 있는 기부금과 정부 보조금, 그 용처의 정당성일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19세기 영국의 보수당을 이끌고 총리를 두 차례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거짓말에 대한 정의를 새삼스럽게 음미해 본다. “거짓말엔 세 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방점은 통계에 찍혀 있다. 불변의 수치마저 조작해 착시를 불러일으키기 일쑤인 세태에 대한 풍자다.

그러니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한 쪽 진영은 진정으로 승복하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면 사회 분열과 혼란 또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로마의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진실의 입에 진실을 가려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중세 시대에 강의 신 홀로비오의 입에 손을 넣고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잘라도 좋다고 서약했다는 그 진실의 입앞에서라면 손이 잘리는 두려움 때문이라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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