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걸으며
공원을 걸으며
  • 전주일보
  • 승인 2020.03.0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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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금 종 /수필가
백 금 종 /수필가

나무에 초록이 눈뜨고 연한 옷을 갈아입을 즈음에 효자공원에 갔다. 그곳에 가서 이슬로 세수하고 나래를 펴는 새 잎새들을 만나고 싶었다. 노란 병아리 부리처럼 톡톡 솟아오른 산수유 꽃봉오리의 미소도, 소녀 가슴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개나리의 수줍은 인사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작은 야산에 만들어진 공원이어서 오르내리는 길이 아기자기하다. 나무들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사붓사붓 걷는다. 이 나무를 바라보고 저 꽃나무와 눈인사를 한다. 새봄을 맞이하는 나무에도 어떤 기다림과 설렘이 있는지, 밤새 나그네새가 날아와 벗이 되었는지, 봄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흔들어 놓았는지 눈치를 살핀다. 저만치서 보면 푸른 기운으로만 보이던 작은 잎이 눈을 뜨고 날 반긴다. 꽃송이도 나무도 숲도 따스한 봄볕에 기지개를 켠다. 아린 맛이 사라진 훈훈한 바람에 가지들이 너울너울 춤사위도 할라치면 공원에는 생명의 환희가 넘실댄다. 내 마음에도 연둣빛 물이 든다.

새들이 짹짹 재잘재잘 소란하게 지저귄다. 참새 · 박새 · 찌르레기랑 텃새들이 이 가지 저 가지로 포르르 · 쪼르르 날아오르며 사랑놀이에 열중한다. 한 마리가 달아나듯 날면 그 뒤를 여러 마리가 쫓으며 희롱한다. 사랑의 계절, 아마도 암컷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이 경쟁하는 것이지 싶다. 모든 생물에게 번식은 최대의 생존 목표이고 과제다. 내 유전자를 많이 퍼뜨려 개체를 불려나가려는 건 본능이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다느니? 내 집 마련이 어렵다느니? 육아가 힘이 든다느니등의 걱정에 싸여 청춘을 덧없이 보내고 있으니 발달한 문명사회를 이룬 게 되레 독이 되지 않았나 싶어 답답하다.

새들의 희롱을 엿보다 다시 발길을 옮긴다. 오르막길을 조금 걷다 보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거기다가 돌멩이가 불쑥불쑥 솟아 있고 나무뿌리가 뱀 몸통처럼 엎드려 있다. 자칫하면 미끄러지거나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서둘 수가 없다. 아니 서두르지 않는다. 걷기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서두르지 않으니 그래서 좋다. 조금 더디 가더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돌부리가 보이면 치워놓고 가지가 가로막으면 돌려놓고, 가다가 숨차면 숲 사이로 푸른 하늘 한번 쳐다본다. 그런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이 나무의 마음이고 숲이 모습이고 공원을 만든 목적일 것이다. 세상사는 일도 같은 이치려니 싶다.

그래서 공원은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제철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곳, 때가 되면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곳, 저만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무리하지 않고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곳, 그리고 혼자만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며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지향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려니 싶다. 그래서 공원은 무언가를 채우려 욕심을 부리는 광장이 아니라 양보하고 순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미덕을 품고 있는 산 교육장이다.

매섭게 불던 바람도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렇지만 꽃 시샘을 하는 이 무렵의 바람에는 달래나 냉이처럼 씁쓸하면서도 톡 쏘는 향긋한 맛이 있다. 거기에 노란 개나리의 향기 품은 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면 그것은 더 없는 행운이다. 다 같은 바람이지만 공원의 바람은 다르다. 칵테일 술맛처럼 그 오묘한 맛이 있다. 그 바람에 취해 나는 공원의 숲속 길을 혼자 걷길 좋아한다. 걷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맑아져 세상과 마주하며 켜켜이 쌓인 불편함이 어느새 사라진다. 우연히 만나 함께 걷던 바람은 바람 길로, 나는 내 길을 가는, 그 만남과 헤어짐에서 인생사의 무수한 단면을 실감한다.

몇 년 전이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하자 이 공원에 가자고 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봄볕 아래 걷는 어머니 머리는 순백이었고 이마의 주름도 밭고랑처럼 깊어졌다. 마른 수수깡처럼 마르고 작아진 어머니. 그런 몸으로 옛날 가락대로 냉이와 달래도 캐고, 산수유를 반가워하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나마 버거우셨는지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다며 풀숲 벤치에 주저앉았다. 메마른 다리는 삭정이처럼 말라 차가웠다. 양파껍질처럼 한 꺼풀씩 자식에게 아낌없이 벗겨 다 내어주었기 때문일까. 칭얼대던 자식들을 어르며 불러주었던 그 자장가 소리가 숲 사이를 돌아 흐르는 바람을 따라 들려왔다.

몇 해 전으로 되돌아가면 저만큼 벤치에 앉아 계실 듯 그리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벤치에 앉아 본다. 공원은 현실의 삶에서 찌들고 망가진 육체와 영혼에 위로를 주고 치유해주는 역할을 한다. 세상의 복판에 홀로 떨어진 듯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도, 또한 마음속에 잡다한 번뇌들이 폭풍우처럼 휩쓸고 지나갈 때도 공원에 오면 차분해지고 위안을 얻는다. 푸른 나무들이며 사시사철 때맞추어 피는 꽃들을 바라보면 짚불처럼 사그라지는 고달픈 생의 끝자락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공원에 오면 잊고 지내던 계절을 새삼 느끼기도 하고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상념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 이봄에 죽었던 가지들이 살아 움을 내는 현장, 뾰족하게 솟는 새싹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원이다. 삶의 애착은 이 봄에 더욱 강렬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 하나에도 생명 살아 숨 쉬는 걸 느낀다.

지난 가을에 쓸쓸히 나무를 떠났던 잎들이 거름으로 썩어 새잎을 낸 그 순환과 윤회의 현장을 보며 떠나는 것이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님을 본다. 공원에는 그리움과 쓸쓸함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소생과 희망의 싹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날엔 작은 행복이 엷은 새순처럼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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